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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그릇. 투명한 우주의 그릇에 뽀오얀 비가 내린다.
12월에 내리니 겨울비다. 그런데 겨울이라 하기 부끄러울 만큼 포근한 날씨다.
평소처럼 식사하고 커피를 내려 마셨지만, 세수도 거른 채 창문에 바짝 붙어있다. 비를 맞을 것도 아닌데, 비로 세수할 것도 아닌데, 비가 오면 왜 세수를 하기 싫은 걸까? 창문에 바짝 붙어 눈만 멀뚱멀뚱, 손을 놓고 있다. 아니, 아침부터 꼼짝하지 않고 뜨개질만 하고 있다.
카톡으로 카톡카톡 소통을 하면 전화할 일도, 전화받을 일도 없으니 오늘은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된다. 일하고 또 일에 매달렸던 젊을 때, 한 때는 이런 날을 얼마나 고대했던가? 외딴 빈 집에서 하루라도 보낼 수 있으면 참 좋겠다 했던 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를 오롯이 즐기고 싶었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 빈 집에 남아 혼자서 불멍을 하고 있다.
그런데, 고대했던 것만큼 좋은 것 같지는 않다. 그게 그러니까, 상상이 좋은 거지 막상 그 상황이 오면 부푼 기대만큼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상상은 가 보지 않았으니 거품처럼 기대가 포함되지만 현실은 기대가 아닌 실제상황이어서 그런 걸까? 혼자 있으니 사람이 또 그리워지는 이 뚱딴지 같은 심보는 뭐란 말이지?
음악처럼 겨울비가 내린다. 잠시 쉬었다 가도 되련만 소리도 없이 와서는 오후 내내 창문에 서성이고 있다. 너무나 조용한 공기, 숨소리조차 침묵하고 있다. 동생에게 전화할까? 한 달째 남편이 여행 중이어서 심심하다는 친구와 통화를 할까 하다, 젊어서 하고 싶었던 빈집에 혼자 있기를 즐겨보기로 한다. 그런데 바로 그때, '즐기자'라는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스멀스멀 기쁨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신기한 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뜨개질만 한 날, 사람소리 하나 듣지 않고 빗소리만 들은 날, 내가 나에게도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오늘. 오늘 같은 날이 또 있을까? 내일도 겨울비는 내린다는데 오늘 같은 날이 또 와줄 수 있을까? 포근포근 내리는 비와 이야기를 나눈다. 나, 이래도 되는 거지? 이걸 다 누려도 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