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봄날
창틈을 비집고 들어온 눈부신 햇살 때문에 늦잠에서 깨어났다.
커피를 내린다.
제부가 사준 운남 커피. 커피를 내릴 때마다 제부가 생각난다. 바리스타를 자처하는 제부의 커피는 우리 자매가 극찬을 아끼지 않는 향이 있다. 따뜻함이 배어 있는 인간적인 향. 제부 옆엔 늘 동생이 있으니, 오늘도 난 기다림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 글쎄 들어가자구."
"싫어, 안 간다구."
부모님의 큰 소리가 바람에 실려왔다. 남편과 흙을 나르고 있을 때다. 뭔 일인가 한달음에 달려갔더니, 엄마는 꽃밭에서 풀을 뽑고 있고, 아버지는 그런 엄마를 자꾸 집안으로 들어가자고 채근하신다. 며칠 전부터 엄만 굽은 허리에 뒷짐을 지고 손엔 전지가위를 들고 꽃밭을 서성이신다. 꽃밭 어딘가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나뭇가지 하나를 툭 꺾어버리고, 다시 한참을 앉아서 풀을 뽑으신다. 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들네가 온다고 떡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쌀을 사야 한다고. 아버지와 내가 아니라고, 딸이 다 준비했다고 만류하니 "난, 그래도 할 거야." 손을 부들부들 떨던 엄마다. 감정조절이 안 되는 치매 엄마의 관심을 구정뜨개실로, 간신히 환기시켜 드렸었는데..... 틈만 나면 큰딸이 부탁한 여름 커튼을 뜨느라 딸이 찾아가도 시큰둥하시던 엄마다. 그런 엄마가 봄을 알아차리셨으니 걱정이다. 그렇게 좋아하던 실과 바늘 대신 전지가위와 호미를 잡으셨으니 올봄엔 또 뭔 일을 만드시려나? 진달래꽃을 단풍나무가 가린다고 어느날, 수형 좋은 단풍나무 반을 뚝 잘라내셨다. 작년엔 이쁜 인동꽃을 방해하는 20년 넘게 잘 자란 보리수나무를 뽑아버린 엄마다. 지나다니는 사람을 보시겠다고 꽃가지를 싹둑. 그늘에서 자라는 꽃을 양지에 옮겨 심고,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과실나무도 꽃나무도 남아나지 않으니, 도무지 안심할 수가 없다. 관심을 뜨개질로 돌리려 왕창 실을 사드렸었는데...... 이제 봄이 왔으니 동생네 꽃과 나무가 무사할지 걱정이 되는 것이다.
엄마는 아들바라기. 늦둥이 막내아들을 제일 많이 기다리신다. 뉴질랜드로 일 하러 간 동생이 설에 오지 못했다. 두 딸이 맛있는 갈비찜을 해드렸지만 오지 않는 아들 때문에 입맛이 없다 하셨다. 이제나 저제나 막내 오기만을 기다리시는 엄마. 저 애달픈 마음을 무엇으로 달래드려야 하나?
왜 마음이 바쁜 걸까? 왜 봄이면 이렇게 기다림이 더해지는 걸까? 따뜻한 봄볕 때문일까. 엄마가 자꾸만 꽃밭에 마음을 뺏기는 것은 꽃이 그리운 게 아니란 것을. 엄마가 봄볕에 서성이는 것이, 마음 둘 곳을 찾아 헤맨다는 것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그나마 꽃이 있고 나무가 있어 다행이란 걸 이제야 깨달았으니...... 울 엄마의 봄날은 언제나 오시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