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뚤빼뚤 글쓰기

토요일에 비가 오면

요술공주 셀리 2024. 4. 20. 09:30

아침에 깨어난 나무가 세수를 한다. 뽀얗던 연두 얼굴에 비가 내리면 나무가 초록이 되는 매직. 봄비가 내린다.

나는 어제, 서둘러서 꽃씨를 뿌렸다. 무거운 돌덩이를 날라다 화단을 넓히고, 넓힌 화단에 천일홍과 종이꽃, 금규화 꽃씨를 뿌렸다. 모두 이웃이 나눔 해준 꽃씨라서 "꼭 나와주라"라고 고운 흙을 덮어주었다. '토요일엔 비가 온다'라는 일기예보 때문에 앞집도 꽃씨를 뿌리고, 윗집도 수국과 고광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젠 이웃 아낙네들이 모두 호미를 들고 땅을 파고 있었다.

살금살금 비가 오는데, 나는 무얼 해야 하나? 촉촉한 앞산엔 산 벚꽃이 한창이다. 하루가 다르게 초록을 칠하는 나뭇잎을 바라보다가, "그래 오늘은 불멍이다" 서둘러 난로에 불을 지핀다. 어제는 반팔이었지만, 오늘은 스웨터를 입었다. 어제는 일바지에 호미를 들었지만, 오늘은 커피 한 잔을 들고 '살바도르 달리'의 늘어진 시계(기억의 지속)처럼 나도 소파에 푹 파묻혀 축 늘어져본다. 오늘은 산도, 나무도, 꽃도 나처럼 쉬고 있다.
 
그런데 이건 아니다 싶다. 나무도 세수를 하고 산벚꽃도 화사하게 화장을 했는데, 내가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거다. 서둘러 점심을 준비한다. 비 내리는 주말엔 기름 냄새지. 어제 따놓은 두릅을 기름에 튀기고, 아들이 좋아하는 더덕에 고추장을 발라 더덕을 굽는다. 수산나네 집에서 뜯어온 귀한 참나물을, 참기름 양념에 버무려서 상에 올려놓았는데 뭔가가 아쉽다.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여놓으니 강원도의 자연 밥상이 차려 졌다.
매콤하고 부드러운 더덕구이와 쌉쌀하고 상큼한 나물무침. 두릅튀김을 달래간장에 콕 찍어 먹으니 강원도의 힘이 불끈 뿔끈. 두둑한 점심 덕분에 절로 나오는 힘을 핑계 삼아 오랜만에 붓을 잡았다. 1달여 전에 옆집 은0 씨가 나눔 해준 패브릭 가방 4개. 염색물감과 붓통을 들고 오는 손이 바쁘다. 그림은 늘 설레는 작업. 손도, 발도 괜스레 빨라지고 바빠진다.
 


 
오늘은 작은 size의 가방부터 그리기 시작한다. 꽃들이 지천이니, 그림 소재도 꽃이다. 홍매화와 철 이른 달리아. 꽃을 이고 있는 사람까지 그리고 나니, 가방의 주인이 궁금해진다. 어버이날에 내려오는 며느리와 동생의 며느리, 가까운 이웃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다들 좋아하고 잘 사용해 주면 좋겠다 생각하니, 마음이 뿌듯해진다.

비가 그친듯하여 밖에 나가보면 조용히, 소리 소문도 없이 내리는 비. 하루종일 비가 내린다.
토요일에 비가 왔으니 내일은 또 어떤 꽃이 피어나려나? 작년에 못다 핀 배꽃이 배시시 웃고 있다. 아, 내일은 너. 배꽃이 또 피어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