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술공주 셀리 2024. 6. 16. 10:48

오전 10시 반. 난, 오늘 할 일을 이미 다 완료했다. 오늘은 새벽에 일어나 7시 미사를 드렸다. 아침 미사에서 독서 봉사를 하기 때문이다.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모종가게에서 꽈리고추와 쌈겨자, 디기탈리스 모종을 샀다. 덕분에 평소보다 늦은 아침 식사를 했지만, 여유로운 일요일이다.

엊그제 심은 늦깎이 노각이 어젯밤 내린 비로 꼿꼿하게 자리를 잡았다.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오다가 끝물이어서 작디작은 딸기를 한주먹 땄다. 직접 만든 식빵과 밭에서 캔 감자, 딸기와 커피 한 잔이 아침 식탁에 올랐다. 아직 꽃이 피지 않은 감자가 궁금해서 캐 보았는데 와, 기대하지 않은 알이 맺혀있는 게 아닌가. 6월의 하지감자다. 작지만, 첫 감자는 부드럽고 연했다. 아직 덜 자란 골프공만 한 감자는 제대로 맛이 있었다.
재미난 농사. 이 맛을 알 것만 같다.
 



겨자쌈 모종 6개, 꽈리고추 3개를 심는데 왜 또 풀이 보이는 걸까? 난, 저 튼튼한 풀을 보면 왜, 캐지 못해 안달이냐고......
모종 심기보다 풀 캐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여름꽃 디기탈리스 모종까지 심다보니 어느새 해가 중천. 성난 햇볕에 목덜미가 따갑다. 갈증이 난다. 아, 어제 만든 보리수청이 있었지? 꿀 한 스푼과 찬물을 붓고, 얼음을 띄워 남편 먼저 챙기니, "맛있네." 한다. 맛있단다. 오호호, 고마워라.
 



일주일 만에 집에 온 남편이 김밥을 해달라고 한다. 있던 김과 계란, 햄과 단무지, 텃밭에서 뜯은 시금치나물과 비법 재료 '맵짤이'를 넣어 '금 나와라 뚝딱'해서 김밥을 해서 먹었다. 이럴 때 남편에게 콕 짚어하는 말이 있다. "이거, 시금치는 내가 농사지은 거야."
 
어제 수확한 양상추와 브로콜리를 손질했다. 양상추는 신문에 싸서 냉장고에 보관하고, 브로콜리는 식초를 희석한 물에 담가 씻은 후, 끓는물에 데쳤다. 오늘 저녁에 먹을 만큼만 남기고, 나머진 냉동실에 보관하기로 했다.
오후 4시가 되면 힘이 빠지는 해님. 해님이 쉬어가는 시간인가 보다. 해님이 쉴 땐, 밭의 작물도 쉬는 시간이다. 한 바퀴 밭을 돌다가, 오전에 심은 아가들을 살펴보니, 역시 힘들어 고개를 숙이고 있다. 흠뻑 물을 뿌려 주었다. "오늘밤 푹 쉬고 힘을 내거라. 이 땅이 네 집이니, 뿌리를 내려보거라." 하고 응원을 했다.
 

 

아들이 좋아하는 순대. 순댓국이 저녁 메뉴다. 순대집에서 무김치를 동봉해줬지만 뭔가 아쉽다. 텃밭으로 나가 깻잎과 상추, 부추를 뜯어와 며칠 전 소금에 절인 오이를 꼭 짜서 함께 버무려주었다. 고추장과 고춧가루, 식초와 간장, 설탕으로 간을 맞춘 이른바 '겉절이'를 했다. "부추가 좀 질겨도 겉절이가 순대의 느끼함을 싹 잡아주네." 역시 남편이 내편. 제일 맛있게 먹어주었다. 제법 넉넉히 만든 겉절이가 금세 동이 나버렸다.
 



부모님은 이곳에 정착한 지, 25년이 다 되었다. 백묵 대신 삽을 잡은 아버지는 정착 초기에 비료를 작물에게 직접 뿌려 작물을 한꺼번에 보내기도 하셨다는데, 이젠 능숙한 농사꾼이 다 되셨다. 동생을 따라 내려와 아버지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나. 꽃만 좋아했지 작물은 부모님 몫이라 생각했는데, 연로하신 부모님 대신 밭에서 노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토마토와 고추, 가지, 오이의 곁순을 따 줄줄 알게 되었고, 올핸 열무와 여름배추를 심어 김치도 담을 생각이다. 빼곡히 자란 시금치가 아까워 솎아주는 걸 싫어하던 내가, 과감하게 뽑아주는 솔선수범을 보이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던 사람이 차근차근 이모저모를 챙기고 있다. 이제야 열등생 반열에서 겨우 빠져나온 것 같다.
작은 아들이 그랬던가? "엄마, 제발 sun cream 좀 바르고 화장을 하시라." 고. 아들 말대로 크림도 바르고 화장도 하는데, 밭이 좋고 밖이 좋으니 점점 까매지는 얼굴을 어쩌란  말이니? 새까만 손, 새까만 얼굴이 이젠 네 엄마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