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의 여왕
창문을 열어젖힌다. 7월의 첫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문턱을 넘는다. 싱싱한 아침 바람이다.
오늘 해는, 구름과 함께 나타났다. 10시가 되어서야 쨍쨍한 볕이 나왔다. 가능하면 더 많이 빨래를 하려고 이 방 저 방에서 빨랫감을 모아 세탁기를 돌리고, 내일부터 온다는 비로 습해질 집안에 햇볕을 채워둔다. 그래, 오늘은 햇볕을 저금해서 집안일에 집중을 해보자꾸나. 장롱 문도 열고, 싱크대 문도 열어 통풍을 하고 음식 쓰레기도 미리미리 모아서 처리를 한다. 이 참에 냉장고도 털어본다. 오래 묵은 배달해 온 양념통과 소스를 비우고, 아까워서 버리지 못한 김치 쪼가리까지 버리고 나니, 냉장고도 넉넉한 빈자리가 생겼다. 이왕 털기 시작한 냉장고. 엊그제 김밥하고 남은 시금치나물과 소시지, 남은 밥까지 동원해 오늘의 점심 김밥을 만들었다. 김밥 한 줄이지만 남은 재료를 버리지 않고 활용했다는 뿌듯함에 자화자찬을 한다. 일에 묻혀 살던 옛날엔 먹는 양보다 썩혀 버린 식재료가 부지기수 많았기 때문이다.

한낮의 햇볕이 따갑다. 이 때다. 부엌 한쪽에서 늘 젖어 있는 수저통과 도마, 집기들을 햇볕에 빨래처럼 널어놓는다. 스테인리스 숟가락이 햇빛에 유난히 반짝인다. 이게 뭐라고 소꿉장난하는 아이처럼 신이 나고 또 재미가 있을까. 아, 살림하는 재미가 이런 건가 보다. 남은 재료를 묵혀 버리지 않고 김밥도 만들고, 빨래처럼 식기도 햇볕에 널어 소독할 줄도 알았으니 이쯤 되면 나도 이제 '살림의 여왕' 반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으려나?

재미 난 건 더 해야 맛이 있지, 뭐 또 할거 없나 찾아보니 엊그제 캔 감자가 생각났다. 박스에 담아 놓았는데, 그만 잊고 지내는 며칠 사이에 벌레가 날아다닌다. 감자 서너 알이 그새 썩고 있으니, 조치가 시급하다. 감자는 햇볕이 상극. 그늘에 쏟아 통풍을 시켜준다.

하루가 화살 같이 지나간다. 감자도 큰 일 날뻔 했지만, 냉장고를 정리하다 보니, 산지 열흘이 넘은 닭다리를 발견한 것이다. 하루에도 수도 없이 열었던 냉장고인데 왜 저걸 발견하지 못했을까? 아니 발견했는데도 늘 보던 거라서 유통기한이 지난 걸 체감히지 못한 탓이다. 감자를 넣고 매콤하게 닭볶음탕을 해주면 아들이 정말 잘 먹을 음식인데, 눈물을 머금고 버려야 했다. 살림 잘한다며 스스로 칭찬하더니 자찬에 재를 뿌린 닭다리. 그럼 그렇지, 내가 뭔 살림의 여왕? 상해서 버린 닭다리 때문에 살림의 여왕도 물 건너가 버렸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비록 닭다리는 버렸지만, 이불도 빨고 햇볕에 식기도 소독하고, 감자도 건졌으니 오늘 하루도 이만하면 성공한 셈이다. 끝도 없고, 표도 안나는 집안일. 그래도 이만하면 전에 비하면 일취월장한 수준이다. 조금씩 재미를 느껴가는 살림살이, 이제 여왕이 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