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뚤빼뚤 글쓰기

심심하면 생기는 일

요술공주 셀리 2024. 7. 2. 12:14

오전 내내 인덕션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다. 다 보리수 때문이다. 잼이 냄비 바닥에 눌어붙지 않도록 주걱으로 저어주고 있다. 오래 서 있는 탓에 다리가 아프다. 보초의 수준을 넘어 벌을 서는 것 같다. 엄마 때문이다.



어제저녁, 센터에 다녀오시는 부모님을 살피러 동생 집에 갔더니 엄마는 보리수를 따고 계셨다. "엄마 엊그제 보리수 따서 효소 담았잖아요."
"또, 뭐 하시게요?"
보리수나무에 올라가 열매를 따는 위험천만한 모습에 당황해서 볼멘소리를 했더니 "심심해서"라고 하신다.  

엄만 심심한 게 문제다. 엄마가 심심할 때면, 균형이 잘 잡힌 아름다운 단풍나무 반이 뚝 잘려나가고, 꽃복숭아와 미스김라일락 가지가 싹둑 잘려나간다. 몇 년 전엔 20년 자란 보리수를 캐 버려, 우리를 놀라게 하셨다.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 젊은이도 파내기 힘든 나무를, 평균 나이 90세인 두 분이 캐서 옮기셨으니 말이다.

엄마는 오이도, 호박도, 가지도, 토마토도 따서 우리 집 현관 앞에 갖다 놓으신다. 엄마의 레이더는 24시간 작동을 한다. 늘 가위를 들고 다니신다. 엄마의 레이더망에 걸리면 바로 처리되는 일들. 늘 망설임 없는 직진이다. 그래서 나무도 잘려나가고 황당한 일도 생기지만, 잔디 밭과 밭의 풀도 엄마가 깨끗하게 뽑을 때가 많다. 그 뿐이랴, 손이 많이 가는 파와 부추 다듬기, 마늘을 까는 일도 다 엄마의 몫이니 도움이 될 때도 많다.
 
그런데, 오늘은 보리수 잼이다. 엄마가 따 준 보리수는 애매한 양이어서 엊 저녁엔 예정에 없던 보리수를 늦게까지 따야 했다. 뭐, 이런 일이 한 두 번인가? 무며, 배추를 뽑아 놓은 덕분에 연 이틀 김치를 담은 적도 여러 번인 것을.....



오늘은 아침부터 비다. 하루 종일 내리는 비로 밖에 나갈 수가 없다. 풀 뽑을 일도, 전지 할 일도 없으니 나도 무척이나 심심하다. 루틴으로 하는 집안일. 빗소리만 가득 찬 집에서 할 일은 보리수잼을 만드는 일. 많지도 않은 양인데도 오후가 되어서도 여전히 불 앞에서 서성인다. 그러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거라도 할 일이 있으니......

어제저녁에 열매를 끓여 놓고, 오늘 아침에 씨를 제거해서 한참을 끓이고 졸여서 잼을 완성했다. 오후 세시. 끓인 잼은 식혀서 병에 담아 냉장고에 담아 보관하면 된다. 잼을 담기에 최적인 용기로는 손주가 사용한 이유식 유리병이 최고다. 그런데 내 것은 딸기잼과 보리수청을 담느라 다 사용을 했다. 동생네 집에 가서 여분의 병을 가지고 오는데, 앗 또 엄마다. 키 큰 해바라기를 비닐끈으로 가지런히 묶어주고 쓰러지지 말라고 돌을 쌓아준 흔적. 언제 또 저렇게 해놓으셨을까?
후후후, 흐뭇한 미소 속으로 따뜻한 엄마의 손길이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