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꽃비
"미칠 만큼 심심하다. 그치?"
할 일이 없어 남편과 TV앞에 코 박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산에 가자."는 이웃의 부름이 축 늘어져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런데 늘 다섯이던 등산 멤버가 오늘은 여섯이다. 처음으로 남편이 합세한 우리는 초행길인양 낫을 들고 전진을 했다. '정글의 법칙'에서 처럼 낫으로 밀림?을 헤치며 전진을 하고 있자니, 탐험을 하는 군인처럼 힘이 넘친다.
그러나, 봄나물을 뜯으러 다니던 이웃들이 여름 내 발길을 멈춘 산엔 억새풀과 도깨비방망이, 키 큰 잡초가 걸음을 붙잡고 있어 전진이 힘들 정도. 선두에서 잡초를 제거해 준 두 남자의 낫질 덕분에 우리는 단풍의 절정을 만끽할 수 있었다.

바사삭, 바사삭, 바삭바삭 낙엽 밟는 소리만 들리는 산등성이쯤 올랐을 때 귀가 쫑긋, 가슴이 벌렁하는 말이 들렸다.
"아무래도 뱀 같지?"
"그런데 움직이질 않네."
그리고 낫으로 찔러보는 일행의 모습이 포착됐다. 나무에 뚫린 구멍 앞에 둘러앉은 일행은 "물컹물컹한 게 뱀이네. 근데 벌써 겨울잠인가?" 두런두런, 나무 앞에서 꼼짝을 하지 않으니 뱀이란 말에 놀란 내가 소리를 질렀다.
"제발, 뱀 깨우지 말아요!"
산에 가자는 말에 "산 말고, 늘 가던 강가로 산책 가자." 했던 나다. 뱀 때문이었는데 겨울잠 자러 간 뱀 앞에서 저러고 있으니 아이고, 무서워라.

"어머나, 이건 느타리버섯인가?"
"언니, 도토리 줍자."
"이 산, 가을엔 처음 오나? 근데, 너무 이쁘다."
"우리 동네가 단풍은 제일 예뻐."
우린 오랜만에 올라온 동네 뒷산의 풍경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눈 밝은 언니가 발견한 것은 '진달래 꽃'이었다. 세상에 동면하러 들어간 뱀의 둥지 바로 옆에 진달래꽃이라니 직접 보고서야 믿을 수 있었다.

가을에 핀 진달래꽃 때문에 우린 반가운 마음이 먼저였지만 '지구 온난화'가 피부에 와닿은 현실 앞에서 등산은 열띤 토론장이 되었다.
봄인 줄 알고 나온 꽃이 진달래뿐이랴마는 저 가녀린 얼굴이 얼마나 버틸 수 있으려나?
불타는 듯 붉디붉은 단풍 옆에 연분홍 꽃치마는 여린 애기같이 애처롭기만 하다.

하산하는 산 입구에 다다르자 여린 이파리가 반짝반짝. 햇빛에 흔들리는 애기 이파리는 불과 몇 년 전에 심은 자작나무다. 노란 이파리가 마치 동그란 유리구슬 같다. 바람 한 자락에 촤라락 흩뿌리는 노란 꽃비. 가을에도 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