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뚤빼뚤 글쓰기

은행털이 공범

요술공주 셀리 2024. 11. 8. 13:18

"자기야, 저녁에 은행 털러 가자"
남편의 제안에 난 단호하게 싫다고 했다. 뉘엿뉘엿 해가 지는 저녁이어서 싫고, 은행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이다.
그러나 오후 4시. 우린 모자와 장갑, 마스크로 완전무장을 하고 결연히 길을 나섰다. 그런데 왜 이렇게 떨리는 걸까? 콩닥콩닥 남의 속도 모르고, 서녘 햇살에 선홍빛 단풍나무가 불타고 있다.



우린 은행이 있는 위치를 잘 파악한 후에, 긴 장대를 풀 숲에 숨겨놓고 우선 주위부터 정찰을 했다. 조심조심, 발걸음도 숨을 죽이며 마음을 잘 다스렸다.
"단풍이 많이 졌네."
"그러게. 갈색이 더 많아졌어."
형제바위의 나무들은 이파리들을 죄 벗어놓고 겨울채비를 하고 있다. 갈대조차 흔들흔들 마음을 잡지 못한다. 은행을 털러 가야 하는데, 목덜미에 위잉~ 찬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자, 이제 시작한다." 단호한 목소리, 결연한 제스처. 남편이 긴 장대로 나무를 내려치자 탱글탱글 달려있던 은행이 후드득 후두둑 땅으로 떨어졌다.



노란 은행잎 위로 떨어진 은행도 역시 노란색. 줍는 일도 쉽지 않다. 그러나 눈에 익고 손에 익어 줍다 보니, 은행은 챙겨간 비닐봉지에 한가득 채워졌다. ㅎㅎㅎ 꼬리꼬리한 냄새가 먼저 반겼다.



남편과 난 은행을 좋아한다. 지독한 냄새에도 불구하고 우린 해마다 아파트에서, 학교에서, 은행을 털어오곤 했었다. 주어온 열매를 발로 으깨고, 물에 씻는 작업이 은행껍질의 지독한 냄새 때문에 고역인데도, 그 과정을 감내하며 은행에 진심이었다.

어제 털어온 은행 역시, 고난의 과정을 거쳐 껍질을 벗겨내면 새하얀 별사탕 모양의 은행이 될 것이다. 껍질을 탁 한 번 깨어내서 전자레인지에 구워내면, 그 고소함 때문에 늘 제한된 개수 7개를 더 먹곤 했었다.

11시. "산책 하자"는 이웃과 함께 낯익은 강변을 한 바퀴 돌았다. 산책 코스 초입의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저희 어제 이 나무를 털었어요." 했더니, 언니는 "안돼. 길가의 은행은 못 먹어." 한다. 차량통행이 많은 길가라서 중금속 천지라고......
그러나 껍질째 푹 끓여 내년에 약으로 사용하면 좋다고 했다. 진딧물 방지엔 최고라고 설명했지만, 내 귀엔 "못 먹어" 란 단어만 남아 있을 뿐. 고소하고 달콤한 꿈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이고, 어떻게 털어온 은행인데......ㅠㅠ
그러니까, 왜 은행을 털어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