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전야
영어의 gray가 우리나라에 오면 아주 다양하게 변신을 한다. 밝은 회색, 짙은 회색, 청회색, 붉은 회색 외에도 노리끼리, 붉으죽죽 등 형용사를 붙이면 맛깔난 수많은 회색이 탄생하곤 한다.
시공업체에게 외장벽체의 색상을 회색으로 한다고 샘플을 줬더니, 달랑 흰색과 검정 페인트를 사 왔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사온 노랑, 녹색, 파랑 안료를 섞어 직접 조색에 참여했다. 흰색 페인트 1/2 큰 통에 노랑 2/3, 녹색 1, 파랑 1, 검정 5개를 혼합했는데 검정안료가 턱없이 모자란다. 작업팀장에게 3개가 더 필요하다고 했더니 또 1개만 사 왔다. 순간 욱하고 올라왔으나, 어쩌랴 그냥 사 온 재료를 섞어 마무리를 했다. 샘플보다 푸른빛이 더 돌고, 결국 검은색이 부족한, 샘플보다 밝은 청회색이 되었다.

사이딩 벽체에 시험 삼아 페인트를 칠해보니, 역시 5% 부족하다. 좀 더 명도가 낮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10% 부족하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라는 나태주 님의 시처럼 자꾸 바라보았더니 청회색도 나쁘지 않다.

"사모님 잠깐 와보세요." 싱크대를 맡은 사장님이 불러 부엌에 갔더니 시공사에서 불러준 하부장 길이가 맞지 않는다며 직접 와보기를 잘했다고 한다. 그래서 장 하나를 빼고, 대신 양념장을 다시 주문했다고......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지? 참았던 화가 다시 올라온다. 그러나 다시 만들 거 아니라면 이 번에도 꾹 참는다.
화장실 장식장도 그렇다. 이왕 다시 해줄 거면 벽체의 넓이와 높이쯤은 미리 측정해서 거기에 맞는 규격의 제품을 구매하는 게 기본 아닌가? 떡하니 제품을 사놓고 거울 위치가 안 맞으니 하랴, 마랴를 내게 물으면 날 더러 어쩌라고? 내 맘이 네 맘이 아니니 참 답답하기만 하다.
그러나, 내가 저 아저씨 때문에 참는다, 참어. 그나마 손재주 있고, 착한 아저씨 한 분 계시니 다 용서를 한다. 툭하고 튀어나온 기둥을 이 아저씨가 멋지게 작품을 만들어 주었으면 된 거다. 색이 좀 밝으면 어떻고, 거울이 좀 높이 달리면 어떠랴. 안전하고, 튼튼하고, 쾌적한 집이면 됐지 뭐.
주말에 입주한다는데, 월말 아니니 다행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