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화가 이기원

아버님께

요술공주 셀리 2022. 9. 17. 21:45

아버님,
청주에 잘 다녀왔습니다.
전시회는 지난 6일부터 시작했으나
저희는 오늘, 형제자매가 모두 모여 축제를 벌였습니다.

갤러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낯익은 그림들,
그 그림 속에서 아버님을 뵈었습니다.
너무 오랜만이어서, 반가움에 앞서 울컥해서 한 동안 그렇게 넋 놓고 서 있었습니다.

하늘나라는 어떠신지요? 어머님과 함께 계시니, 적적하지 않으시지요?

오늘은 가족과 지인들, 충북 문학관 관계자들과, 관련 공무원 구의원까지, 토요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축하 행사에 참석해 주셨답니다. 특히 박태홍 선생님과 창작미술협회 회원들이 참석해서 아버님도 오랜만에 동료들을 보셨으니 많이 반가우셨지요?
고향이셨고, 모교가 있고 교직을 처음 시작한 곳, 청주라서 더 좋으셨지요?

생전에 개인전을 열고 싶어 하셨는데, 해 드리지 못함을 많이 후회했습니다.
창미 회원을 직접 만나고 보니, "열심히 그림 그려서, 네가 내 길을 이어받으면 좋겠다"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 참으로 죄송했습니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가족의 대 소사를 주관하는 어머님을 제대로 돕지도 못하면서, 그 핑계로 아버님 뜻도 받들지 못했으니 아버님, 죄송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생전에 부모님께 잘해 드리라고 하는데, 그걸 이제 알면 저는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추상화라서, 시아버지의 작품이라서, 여전히 아버님이 어려워서......,
이유와 변명은 많지만, 왜 작품에 대해 한 말씀도 나누지 못했는지? 이 작품은 어떤 그림인지 말씀해달라고 여쭙지 못했는지, 그게 제일 속상합니다.
20여 년을 한 지붕 아래에 함께 살면서, 우린 왜 '그림'에 대해 소통하지 못했을까요?

책장 가득한 아버님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담아도 담아도 끝도 없는 보잘것없는? 물건들을 보면서
'별 걸 다 모아놓으셨다'고 짜증을 냈는데, 그때는 그랬었는데, 아카이브의 대부분이 그때 정리했던 물건이고 보니 그 소중한 물건을 이제야 알아봅니다.

50년대에 사용하던 분도기와 컴퍼스, 화첩과 너덜너덜한 크로키 북, 알파 물감, 심지어 손자가 쓰던 지우개까지 남겨두셨는데, 물감은 물감대로 화첩은 화첩 박스에 따로따로, 정성스레 보관한 아버님의 화구는 제가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손정리 교수님이 만든 도자기 병에 한가득 담아 놓은 붓과 유화물감도 제가 다 챙겨 왔습니다. 손수 제작하신 이젤은 작동이 되지 않아 거실 한편에서 소품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그것도 제가 다 갖고 있습니다.
언젠가 용기를 내어 혹, 붓을 다시 잡을지도 모르니......

그런데 아버님, 왜 그리하셨어요?
늘 엄하고, 말씀 없으시던 분이, 특히 칭찬에 인색하셨던 분이,
가족사진에서는 환하게 웃고 계시니, 사진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더 늙기 전에 작품을 정리하고, 작업에 전념하겠다"며 오포로 이사 가셨잖아요? 찾아뵐 때마다 새로 완성한 작품을 제일 먼저 보여주셨지요. 장학사 생활은 어떠냐? 교장이 힘들지는 않으냐 물으셨지요?

평소 가족만 알고, '이색' 잡안의 종손이라며 늘 근엄하셨고, 집안일이 우선이어서 학교 관련 늦은 귀가도 허락지 않으셨는데, 자수성가해서 가족의 경제적인 책임을 느껴야 했던 큰 며느리는 그저 책임이 무거웠는데, 그 무게의 근원이 아버님이란 생각으로 힘들어했었는데......

우연히 만난 박태홍 님이 제게 말했어요. 이기원 선생님이 큰며느리 자랑을 아주 많이 하신다고......

아버님이 울산 시동생 집으로 가신 후에야 제자였던 큰며느리를 무지무지 사랑하셨음을 알았으니,
너무너무 늦게서야 그 따뜻함을 알았으니, 절 더러 어찌하라고요?

환하게 웃고 계시는, 영정사진 앞에서 엉엉 울었던 큰며느리를 기억하시는지요?

전시회를 준비하며,
아버님의 숨결이 묻어나는 아카이브를 포장하며, 당신을 그립니다. 많이 많이 그립습니다.
그리고, 이제라도 말씀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제가 어떻게 하면, 환하게 웃고 계시는 사진 속의 아버님께, 진정한 웃음을 다시 드릴 수 있을까요?

답장 좀 주세요.
꼭 말씀해 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2022. 9. 17. 큰며느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