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것들(정채봉)
비 온 뒤에 한 켜 더 재 여진 방죽의 풀빛을 사랑합니다.
토란 속잎 안으로 숨는 이슬 방울을 사랑합니다.
외딴 두메 옹달샘에 번지는 메아리결을 사랑합니다.
화초보다는 쑥갓꽃이며, 감꽃이며, 목화꽃이며, 깨꽃을 사랑합니다. 초가지붕 위에 내리는 새하얀 서리를 사랑합니다.
무 구덩이에서 파낸 무들의 노란 순을 사랑합니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왔다는 담양의 죽순을 사랑합니다.
고향의, 해질 무렵이면 정강이에 뻘을 묻히고 돌아오던 건강한 수부들을 사랑합니다.
지나가는 걸인을 불러들여 먹던 밥숟가락을 씻어서 건네주던 우리 할머니를 사랑합니다.
상여 뒤를 따라다니며 우느라고 눈가가 늘 짓물러 있던 바우네 할머니를 사랑합니다. 남의 허드렛일을 자기 일처럼 늦게까지 남아 하던 곰보 영감님을 사랑합니다.
명절 때면 막걸리 기운에 코끝이 빨개져서 소구 하나만을 들고 농악대 뒤를 따라다니며 덩더꿍 덩더꿍 어깨춤이 신나던 복애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동네 머슴 제사를 1백 년이란 긴 세월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지내고 있는 문경의 농바위골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죽으면서 동네 정자 앞에 있는 소나무한테 자기 재산의 절반인 논 15마지기를 상속시킨 예천의 이수목 노인을 사랑합니다.
눈 쌓인 겨울날이면 산짐승들이 걱정되어서 산자락에 무며 고구마를 던져 놓는 송광사 스님을 사랑합니다.
고향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고향 소리를 들려주고자 여치 1만 마리를 키우고 있는 전주의 서병윤 씨를 사랑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 모든 것을 버무려서 그 누구도 아닌 한국의 아이로 복제하고 싶은 (초승달과 밤배) 속의 주인공이 '난나'(나는 나)입니다. 풀꽃 하나도 아끼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다운 화평의 피를 가진 아이, 이 땅의 난나들이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산천과 융화해서 사는 삶, 양적인 물질의 풍요보다는 생활의 질을 추구하는 삶, 그리고 보다 높은 인긴적 사랑으로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 되어 살아가기를 이 밤에 기도합니다.
(1990, 정채봉 감동 언어 ' 그대 뒷모습'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