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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의미(전종호)

요술공주 셀리 2023. 5. 24. 09:07

샤부로베시. 해발 1460m. 랑탕 밸리로 들어가는 첫 관문. 우리 태백산보다 약간 낮은 정도이지만 여기서는 평지 수준이다. 산기슭에 100여 채 여관 규모의 숙소와 상가, 집들이 큰길을 중심으로 양쪽에 올망졸망 모여 있고, 다른 마을처럼 마을 위 끝자락에 곰파(사원)가 있다. 겨울이라 트레커들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방문객을 위해 동네 주민들이 나와 목에 가타를 걸어준다. 가타는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는 환영의 의미로 목에 걸어주는 수건 같은 것이다. 때로는 금잔화 목걸이 말라를 걸어주기도 한다. 이렇게 따뜻한 환대를 받아본 것은 오래전 하와이 공항에서의 환영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게스트하우스 식당에 앉아 찌아(밀크티) 한 잔을 주문하고 잠시 기다리는데 갑자기 오후 시간의 정막이 출렁인다. 소형 버스가 도착하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어제 비행기에서 본 분들이다. 한국인 트레커 부부 여섯 명, 이들을 돕는 가이드와 포터, 그리고 쿡까지 포함되니 꽤 큰 규모다. 여행사나 산악회에서 사람을 모집해서 오는 패키지인 경우, 가이드, 포터, 쿡을 대동하다 보면 규모가 무려 340명 되기도 한다. 친구나 가족 단위로 움직일 때도 포터들이 있어 규모가 커진다. 혼자 또는 둘이 히말라야를 쏘다니는 경우는 흔치 않다.

히말라야는 한국 산악인들에게 평생 한 번쯤 밟아보고 싶은 로망이기 때문에 좁은 산길이 한국인들로 체증이 생길 정도다. 실행하기 어려운 등반 대신 선택하는 트레킹도 45,000m의 고도를 오르내리는 극한의 체험을 요구한다. 두 번은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이 극한의 체험은 역설적으로 묘한 치명적인 중독성이 있다. 그래서 히말라야를 오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 온 사람은 없다는 말이 생겼다. 오지전문여행사는 물론이고, 여행사 수준의 산악회가 모객을 하기 때문에 트레킹 빈도와 규모는 날로 커진다. 초행자는 단체 여행을 하는 것이 좋겠지만 혼자만의 고즈넉한 시간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피하는 것이 좋다. 롯지에서 한국 단체 산꾼들을 만나면 먼 곳에 와 동족을 만나는 반가움을 얻을 수 있는 반면, 하룻밤의 고요와 적막은 포기해야 한다.

몇 명이 여행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정답이 없다. 함께 다니면 위험이 줄고 재미는 늘어나지만, 나처럼 혼자 다니면 위험이 높아지는 대신 고립의 모험과 사색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 여행의 인원은 여행의 이유와 직결된다. 대규모 인원의 여행은 오락과 도전, 체험의 목적에 적합하고, 견문이나 유람의 경우에도 인원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지만, 휴식이나 명상, 순례를 목적으로 한다면 가능하면 인원을 줄일수록 좋다. 외로움과 위험을 기꺼이 감수할 용기가 있다면 나 홀로 여행이 좋다. 여행을 하면서 맞닥뜨리는 문제 중의 하나가 음식이다. 현지 음식을 먹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입에 맞지 않는, 특히 향신료가 강하거나 지나치게 기름진 음식을, 그것도 매일 먹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고육책으로 한국의 대규모 팀은 요리팀을 데리고 다닌다. 산행 중에 운이 좋으면 오랜만에 한식을 얻어먹을 수도 있지만, 여기까지 와서 또 먹는 일의 문제를 다시 한번 더 성찰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오늘이 1231. 와이파이가 터지니 휴대전화가 바쁘다. 새해 인사 문자. 깊은 산까지 들어왔으니 올해는 문자 같은 건 주고받지 말자 결심했는데, 할 수 없이 불가피한 곳에만 답을 보낸다. “세상 끝에 와 있어. 새해 히말라야의 힘찬 기운을 너에게 보낼게

새해 아침을 히말라야 산속에서 맞는다. 왜 나는 내 나라와 가족을 멀리 두고 새해 벽두부터 이 깊은 산속을 헤매고 있는가? 소설가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에서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편안한 믿음 속에서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난 이상 여행자는 눈앞에 나타나는 현실에 맞춰 믿음을 바꿔가게 된다”고 했는데, 편안한 믿음을 뒤집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것인가? 모르겠다. 다만 그의 말대로 지금 내게 닥친 산속에서의 현실을 부정하고 평소의 익숙한 신념체계를 고집한다면 이 여행은 재난으로 끝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끝없이 몸을 낮추고 저 산을 올라야 한다. 바람을 맞고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내 속의 신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려고 떠나는 것이다. 아침마다 730분에 출근하여 북한산을 넘어 떠오르는 해를 내 사무실에서 맞았다. 나의 고민과 수고로 아이들과 교사들의 삶을 조금은 개선하리라 믿고, 남보다 먼저 출근하여 학교의 하루를 준비하며 살았다. 썸바디(somebody)의 의식이었다. 지금부터는 산 앞에 선 단독자, 아무것도 아닌 자(nobody)로서 오직 산을 보며 부실하고 연약한 몸을 끌고 높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나의 의도와 계획을 따라온 걸음이었지만, 이후의 길에서 벌어지는 일은 알 수 없다. 스스로 통제할 수도 없다. 어떤 영화에서 들은 것처럼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산에 맡기고 길을 따라갈 뿐이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숙소는 여기가 마지막이다. 샤워라도 해야겠다. , 뜨거운 물 한줄기에 쏟아지는 은총과 행복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