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얼굴(전종호)
뱀부(1970m). 오늘 점심 식사를 하며 잠시 쉬어갈 마을. 대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 우리말로 대숲, 대나무골이라고 하면 딱 들어맞을 마을이다. 뱀부? 웬 영어 이름? 원래는 이 마을에도 제 이름이 있었을 테지만, 오고 가는 사람들이 영어식으로 부르다 보니 지금은 이렇게 그냥 불리고 있겠지? 그런데 외국인들이 붙인 이름을 제 마을 이름으로 쓰는 이 사람들은 도대체 뭐지? 하긴 사가르마타(‘눈의 여신’이라는 뜻)를 두고도 에베레스트라는 이름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 네팔의 현실이기는 하지만.
출발한 지 4시간. 표고를 500m 높여 힘들게 겨우겨우 마을에 도착하니 이미 도착한 한국인 부부 팀은 점심 식사가 한창이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를 마치자마자 부랴부랴 노새에 짐을 싣고 먼저 출발한 쿡들이 미리 와서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점심을 해 놓고 기다린 모양이다. 구수하고 익숙한 우리 음식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음식은 향수와 비슷한 것이어서 여기 온 지 불과 며칠만인데도 마음이 쿵 하고 넘어진다. 현지 음식을 체험하는 것도 여행의 특권이라 과감히 도전해 보기는 하지만, 향신료가 강한 동남아 쪽의 음식은 내 입에 맞추기가 쉽지 않다.
달밧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볶음국수를 시켜놓고 포터와 함께 다른 롯지(산장)의 의자에 앉아 있다. 아직 좁은 협곡을 벗어나지 못해 물소리만 우렁찰 뿐 하늘도 설산도 시야를 터주지 않고 있다. 다만 청량한 하늘은 저 홀로 한가하고 여유롭다. 햇빛에 전신을 맡겨두고 손바닥만 한 하늘을 보며 멍을 때린다. 순간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린다. 휴대전화가 재생한 곡이다. ‘저 언덕 넘어 어딘가 그대가 살고 있을까 계절이 수놓은 시간이란 덤 위에 너와 난 나약한 사람’ 낮고 두툼한 바리톤의 소리가 저쪽 담을 넘어 흘러와 가슴을 파고든다. ‘바람이 닿는 여기 어딘가 우리는 남아 있을까’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훅하고 올라오더니 깊게 잠긴다. 아, 이래서 신 선생님이 안나푸르나에서 양희은의 ‘내 나이 마흔 살에는’을 듣고 목 놓아 울었다고 하는 거였구나! 고성현의 <시간에 기대어>가 예기치 않은 장소와 시간에 우연찮게 나를 흔들었다. 시간? 시간에 기댄다? …….
시간은 레일과 같다. 레일에 기차가 탑재되고 달릴 때 레일이 의미를 가지듯이 시간은 사람이 기대어 무언가 애틋한 사연이 실릴 때 과거, 현재, 미래가 되고 의미가 된다. 히말라야의 산길에는 사랑하고 이별하고 실패한 지난날의 회한이 있고, 험난한 길에 자신을 던져놓고 극한적으로 시험하는 사람들의 현재가 있으며, 또한 무언가 경이롭고 새로운 체험을 갈구하는 수도하는 마음의 미래가 있다. 히말라야에서는 시간이 같은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대자연의 시간이 있고 인간의 시간이 있다. 네팔 사람의 시간이 있고 트레커의 시간이 있다. 과거의 상처를 떠안고 끙끙거리며 걷는 사람들이 있고, 미래의 꿈을 안고 힘차게 걷는 사람들이 있다. 트레커들의 6·7·8법칙(6시에 기상해서 7시에 식사하고 8시에 출발한다)도 해가 지기 전에 다음 마을에 도착하고자 하는, 자연의 시간에 순응하기 위한 방편이다. 서울에서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면, 카트만두에서는 시간이 거꾸로 흘렀고, 지금 여기 랑탕 계곡에서는 시간이 멈춰 서 있다.
여행이란 결국 시간을 여행하는 것이다. 과거로 가는 여행이 있고 미래로 가는 여행이 있다. 미국이나 유럽에 갔을 때는 미래 어느 시점의 장면들을 발견할 수 있고, 동남아시아에서는 우리의 과거 어느 한 시점에 서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다. 중국의 고산이나 사막, 히말라야에 있으면 압도적인 태고의 한순간에 엎드려 있는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 태고의 장면에서는 시간의 개념이 따로 없다. 삶과 죽음이 지척 간에 있고, 역사라는 것은 한 찰나에 불과하다. 울며불며 애면글면하는 속세의 일도 한순간 지나는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여행은 시간을 객관화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우리는 시간은 돈이고 충실하게 시간을 관리하는 것이 인생의 성공법이라고 믿고 살았다. 벤자민 프랭클린 이후로 시간은 플래너와 다이어리에 의해서 갇혀 있었다. 시간은 분 단위로 잘게 쪼개지고 걸음은 총총걸음이 되었다. 계획되고 관리되지 않은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하고 안타깝게 여겼다. 이러한 현대인의 시간에 대한 집착과 과도한 관리는 히말라야 같은 태고의 압도적인 대자연에 들어와서 보면 좀 우습게 보이기도 한다. 뭘 한다고 그렇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현대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매우 특이한 모습으로 보이는 것 같다. <어린 왕자>를 읽고 작가가 죽은 줄도 모르고 생떽쥐베리를 만나러 파리에 온 사하라 사막 투아레그족 출신 무사 앗사리드는 <사막별 여행자>에서 “프랑스인들은 일과표를 작성해 오늘과 내일, 한 달 후의 일까지 미리 다 계획을 세워 놓는다. 그리고 시간을 분과 초로 나누어 바쁘게 뛰어다닌다. 매우 젊은 나이부터 노후를 걱정하고 그 대책을 마련하느라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사막에는 테제베, 자동차, 자동문, 에스컬레이터, 다이어리 같은 것은 없다. 우리가 사는 것은 미래가 아니라 오직 현재다. 아침이 오면 우리는 밝아오는 태양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다. 알람도 없다. 어둠이 내리면 주어졌던 하루에 감사하며 잠자리에 든다. 우리는 시간을 재지 않는다.”고 적었다. 여기 이 골짜기의 사람들도 ‘옴마니반메훔’을 외우며 해가 뜨면 일어나 일하고 해가 지면 잠자는 자연의 시간에 따라 살고 있다.
시간이란 개별성의 집합인가? 연속성의 흐름인가? 흐르는 것이라면 직선적으로 흐르는가? 아니면 윤회적으로 흐르는가? 산에 오르다 쉬는 잠깐의 점심시간에 시간에 대한 상념이 물보라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결론은 시간의 얼굴은 볼 수 없다는 것! 다만 우리는 사람의 사연이 실릴 때만 시간을 인식할 수 있고,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행복의 법칙이라는 것을 되뇔 때, 안나푸르나 트랙에서 여러 사람이 눈사태에 묻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뿔싸! 그들의 시간이 여기서 꼬인 것이다. 먼 하늘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명복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