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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뒤의 사연 소설, 나마스테(전종호)

요술공주 셀리 2023. 6. 1. 18:39

발자국 뒤로 두고 왔다고 생각한 물소리는 라마 호텔에서 밤새 자지 않고 울었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유고 시집에 “히말라야에서/ 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 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 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박범신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아아/ 저게 바로 토종이구나”라는 시 ‘히말라야의 노새’를 남겼다. 60 킬로그램 가까운 짐을 등에 싣고 삼사천 고지를 오르내리는 히말라야의 노새를 보고 한평생 고생하신 어머니의 짐을 생각하면서 박범신은 울었고, 우는 박범신을 보고 박경리 선생도 눈물을 흘렸다는 것인데, 인간 노새 네팔 청년들을 보고 나는 잠들 수 없어 히말라야의 물소리와 함께 밤새 뒤척였다.
박범신은 히말라야를 제대로 아는 작가였다. ‘나마스테’나 ‘옴마니밧메훔’의 소리가 입을 통해서 나올 때 떨리는 음성의 진폭, 그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여러 번 히말라야 산길을 걸었고, 이곳 사람들의 종교와 철학의 깊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옹색하고 팍팍한 삶을 가슴 깊이 이해했고, 국제 분업 노동시장의 야만성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나마스테>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장면으로 첫 페이지를 시작하는 연애소설이다. “산벚꽃나무가 우주에 이르도록 도미노로 피는 것을 나는 본다. 그는 산벚꽃 환한 그늘에 누워 있고, 나는 그를 처음 만난 그때처럼, 흰 빨래를 널고 있다.(……) 그와 나 사이, 우주적인 공간으로 뻗어나가 우리를 잇고 있는 빨랫줄을 타고 챙, 챙, 챙, 챙 명도 높은 봄빛이 부서져 흐르고 있는 걸 나는 본다. 이렇게 환한데, 왜 구차하게 그것을 가리켜 사랑이라고 부르겠는가.” 남자와 여자. 사랑하는 여자를 찾아온 남자와 도망간 여자 친구 때문에 마음이 텅 빈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이주민의 설움을 현재 몸으로 살고 있는 남자와, 이주민의 상처를 안고 과거에서 돌아와 사랑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 여자. 남자는 코리안 드림을 좇아 한국에 온 여자 친구가 소식이 없자 그녀를 찾아온 네팔 사람이고, 여자는 부모를 따라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미국에 갔다 LA 흑인폭동 때 아버지와 재산을 잃고 다시 돌아온 한국 사람이다. 남자는 먼저 한국에 온 여자 친구의 행방을 찾아 헤매고, 어렵게 찾은 여자 친구가 남자의 돈을 훔쳐 달아나자 절망에 빠진 남자는 부상을 당한다. 한집에 사는 여자는 사과꽃 향기가 배인 눈을 가진 이 남자를 마음속으로 품게 되는데 자신의 카르마(업보)를 쫓아 헤매는 남자는 허깨비에 불과하고, 이주노동자와 가까워지는 것을 알아챈 여자의 오빠가 출입국관리소에 신고함으로써 여자의 주변에서 추방된다.
이러한 커다란 얼개 속에서 내용의 구성물이 주로 이주노동자들의 노동 현실이라는 의미에서 <나마스테>는 현장 노동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입국 비자를 받기 위해서 뇌물을 쓰고,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온 가족이 동원되고, 이걸 갚기 위해서 이 악물고 일하는 이주노동자의 노동 현실이 적나라하다. 한편,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 한국 사람들은 “네팔 사람처럼 가난해 봤고, 침략받아 봤고, 돈 벌러 팔려 가 봤고, 그러니 우리 같은 사람들 심정 뭐든지 잘 이해해 주겠구나, 생각하는 거 당연하지 않냐고요.”라는.” 절규에 한국인 회사 간부와 직원은 물론, 심지어 미국에서 철저히 차별받고, 유색 인종 간의 갈등을 이이제이以夷制夷 식의 국가 통치 방편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을 처절하게 경험하고 좌절해서 한국으로 돌아온 여자의 오빠조차도 피부색이 다르고 가난한 나라 출신이라는 이유로 남자를 혐오하고 당국에 신고함으로써 추방하는 데 가담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이 환하다’고 말한 남자는 한국 노동시장에서 겪는 각박하고 착취적인 삶을 통하여 결국 ‘세상이 캄캄하다’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 남자는 이주노동자들의 산업재해, 임금 체불, 인종차별, 학대, 자살 등에 방치되어 있는 현실에 분노하여 마지막 수단으로 몸에 불을 질러 한 줄기 빛으로 사라지고, 그 현장을 목격한 여자는 호텔 옥상에서 추락하는 남자를 받아 안음으로써 뇌가 매몰되어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죽는다.
<나마스테>는 종교적 색채가 강한 소설이다. 현실에서 돌출되는 우여곡절을 배제하면, 카일라스산에서 마르파로, 카트만두로, 서울로 흘러온 카르마와, 서울에서 LA로, 다시 부천으로, 서울로 뒤돌아 온 카르마가 엮여서, 이들이 낳은 생명들이 서울에서 카트만두로, 그리고 킬리칸다크 강을 따라 마르파를 거쳐 카일라스로 되돌아가는 생명의 원초 회귀와 인연을 다룬다. 세상의 모든 인연은 카르마에 의하여 발생한다. 할아버지가 젊어 캉자(오체투지)로 카일라스산을 순례했을 때 형성된 밝은 마음 즉, 죽음도 삶도 없는 성스러운 산의 기운이 마음속에 남아서 길을 이끌어 가고 있다고 믿는다. 모든 사람과 사물과 현상은 바르도(bardo)라는 과도기를 통하여 다른 존재로 진화해 나간다. 소설은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 아버지의 카르마를 거꾸로 타고, 아버지 카르마의 또 다른 결과인 이복동생과 함께 카트만두에서 조상의 계보를 따라 티베트인들의 영혼의 성산聖山 카일라스로 돌아가면서 새로운 바로도를 넘어가게 되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고통이라는 커다란 빗자루가 카르마를 쓸어내리듯 한국에서의 모든 고통이 그들의 업장을 소멸시키면서.
나는 지금까지 네팔에 관한 책 중에서 이 소설만큼 이 나라의 역사와 문화와 종교와 철학, 그리고 고단한 현실을 리얼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여행이란 단지 아름다운 풍광만이 아니라, 풍광 뒤에 숨은 사연, 즉 그 나라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의 눈물 나는 살림살이를 꼼꼼히 들여다보고 배우는 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