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화가 이기원

화가 이기원 4(푸른 상)

요술공주 셀리 2022. 7. 27. 09:37

  서울대학교에서 받는 가르침은 오래가지 못했다. 1948731, 이기원은 갑작스럽게 대학을 중퇴하고 만다. 청주중학교의 교사로 발령받아 낙향하게 되면서 학업을 병행하기 어려워진 것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고, 한동안은 고향에서 머무르다가 1955416일 성신여자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부임함에 따라 다시 상경하였다. 이후 서울여자고등학교(1960.04.01.-1965.02.28.), 경기고등학교(1965.03.01.-1970.02.28.), 무학여자고등학교(1970.03.01.-1976.02.28.), 경동고등학교(1976.03.01.-1977.05.24.)에 재직하면서 한동안 미술 교사로서의 생활을 이어갔다.

 

 이 시기부터 이기원은 중단했던 작업을 재개, 1956년 제1회 한국 미술가 협회전에 출품한 것을 시작으로 점차 활동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1950년대의 작품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건 단 한 점도 존재하지 않는 실정이고, 심지어 사진 및 도판조차도 없다. 다만 기록에 따르면 제1회 한국미협전 출품작의 제목이 <해거름>, <사찰의 중앙>이었고, 1958년 아시아반공전 출품작의 제목이 <모닥불>이었던 것으로 보아 아직은 사생을 통한 풍경의 재현을 시도한 구상화를 그리지 않았나 미약하게나마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다 1961년 제10회 국전에 처녀 출품하여 입선한 작품 <푸른 상>에서는 새로운 변모가 나타난다. 이 작품 역시 원작은 소실되었으나, 국전 도록에 실린 흑백 도판으로 대략적인 양식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제목에서 특정한 대상이 아닌 색만을 지칭한 것처럼, 이 작품은 화면에서 사물의 이미지를 전혀 분간할 수 없다. 오직 물감들이 엉긴 비정형적 자취만으로 채워져 있을 뿐이다. 여기서 당시 청년작가들 사이에서 유행으로 번져나가던 서구의 추상 미술사조 앵포르멜의 영향이 짙게 드러난다. 특히 그해 국전은 4・19 혁명 직후 일명 개혁 국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심사 및 운영제도가 재편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추상적 성향의 작품들이 출품되어 입특선한 사례도 늘었다. 특히 수상작에서도 앵포르멜의 영향력이 강타하여, 출품작 중 김형대의 작품 <환원 B>가 국가재건최고회의장상, 이봉열의 <서편>이 문교부장관상에 오르기까지 했다. 그런 정황으로 볼 때 이 작품은 사실 당시 화단의 트렌드를 의식했다는 느낌이 짙긴 하나, 이제 이기원이 표현에 있어서 사물의 재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추상에 진입하였음을 알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기원, 푸른 상, 1961, 유화, 10회 국전 입선작, 10회 국전도록에서 전재


  안태연(미술사가), “이기원, 사색의 창을 향하여”(2019)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