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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람들의 빛나는 세계 (전종호)

요술공주 셀리 2023. 6. 22. 14:23

마을 가운데 넓은 마당에 텐트 여러 동이 쳐 있다. 그들은 트레커가 아니고 랑탕리룽(7,727m)을 오를 등반가들이다. 트레커들은 모두 여기서 집으로 돌아갈 것이지만, 등반가들은 여기서부터 진짜 자기 길을 시작한다. 기껏 5천 이하의 세계를 경험한 나로서는 저들의 78천의 세계를 알 수 없다. 미친 사람들이다. 저 높은 산을 왜 오르려는지는 이해할 수 있으나, 올라서 그들이 무엇을 보고 가슴에 무엇을 남길지는 알 수 없고 알지 못해서 표현할 수도 없다. 광인광급狂人狂及, 광사덕성狂事德成이라고 했던가!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추체험追體驗을 통해서 아는 것뿐이다.

18세기 들어 집안을 나와 장거리 도보여행에 나선 사람들은 좀 더 극적인 장소를 찾아 산을 찾기 시작했고, 더 높은 산을 찾아 알프스로, 히말라야로, 안데스로 가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제 하나의 높은 산 경쟁을 넘어 8,000미터급 14좌 경쟁으로, 16좌 경쟁으로 불이 붙었고, 남성끼리의 경쟁에 여성들도 가세했다. 고소 등반은 처음에는 높이를 다투는 국가 경쟁을 했고, 나중에는 개인끼리 봉우리 수집경쟁을 했고, 지금은 등산의 방법 경쟁을 하고 있다. 그사이 등산은 등정주의에서 등로주의로 바뀌었고, 지금은 보조기구를 사용하는 원정대 중심의 등반에서 무산소, 동계, 단독, 초등 등 고난도 알파인 스타일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제는 인공적인 도움 없이 정당한 방법으로(by fair means)’ 산을 오르는 것이 대세가 되어 가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8,000 고지 등반 기술자들에게 수천만 원의 돈을 주고 상품을 구매하는 상업 등반도 성행하고 있다.

이들을 경쟁에 몰입하게 만든 요인은 무엇인가? 초기 탐험가들이 그러했듯이, 아마 처음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지적, 심미적 호기심이 서양의 젊은이들을 산으로 불러 모았을 것이다. 미답 고산의 정복은 국위를 선양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국가적 지원도 한몫했을 것이다. 국가 간 경쟁은 등반가 개인의 경쟁을 불러오고 그 바람에 미답봉들은 빠르게 정복되었지만, 성공 사례의 뒤에는 알게 모르게 등반 대열에서 희생된 동료 등반가, 현지 셰르파와 포터들이 있었다. 성공한 등반가들도 자신의 손가락이나 발가락 몇 개는 희생의 제물로 히말라야의 신들에게 바쳐야 했다.

엄홍길은 8000m에서의 극한 상황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8,000미터 위에서 겪는 불가사의한 일들은 그 지대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본 사람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극한 상황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말일뿐, 거기서 움직인다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차츰 무의식 상태로 빠져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3분의 1로 줄어든 대기 중의 산소로 인해 체력적인 부담은 가중되고 졸음 속에서 종종 헛것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세계적인 클라이머들도 8000미터를 넘어서 등정에 성공한 뒤에는 죽을힘을 다해 8000미터 이하로 내려온다. 도저히 못 걷겠다고 주저앉아서 시간을 보냈다가는 산소 부족으로 인한 뇌수종이나, 폐수종, 심하면 뇌사상태에 빠질 수 있다.”

이렇게 극한의 상황에서 짧은 시간 동안만 정상에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고봉을 오른 사람들의 감격 어린 문학적 수사는 산을 내려와서 떠올린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8,000m의 카메라맨이라고 불리는 쿠르트 딤베르거는 높고 어둡고 파란 하늘이 지구의 가장 높은 곳을 돔처럼 부드럽게 둘러싸고 있다. 티베트의 무한한 공간 위로. 우리는 세계의 지붕 위에 섰다. 우리는 말을 하고 기침을 하고 서로를 껴안았다. 우리는 웃고 눈 덮인 정상의 이쪽 가장자리에서 저쪽으로 걷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 사이에 있는 수천 개의 봉우리들과 수백 개의 계곡들... 천상에 있는 기분이었다. 수많은 날들 중의 단 하루!”라고 비교적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극한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왜 험한 산을 기필코 기어오르는가? 이들을 높은 산으로 추동하는 동인과 지배하는 정서는 무엇인가? 호기심 또는 탐구심인가? 정복욕 또는 승부욕인가? 두려움인가? 고독인가? 8,000미터 히말라야 14좌를 최초로 완등 한 세계적인 등반가 라인홀트 메스너는 낭가파르바트 초등 때 정상에 함께 오른 동생을 하산 도중에 잃었다. 그 이후 명예심 때문에 동생을 버렸다는 비난과 죄책감에 시달렸지만, 그는 다시 낭가파르바트를 오르며 산에 오르는 심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등지고 혼자 오르는 게 아니다. 이렇게 여기 앉아 있으면 나는 산의 일부가 된다. 때문에 어떤 행동도 신중하게 행해야 한다. 미끄러져서도 안 되며, 눈사태를 일으켜서도 안 되며 크레바스에 빠져서도 안 된다. 나는 여기 쌓여있는 눈과 바위와 구름의 감정을 함께 가지고 있다. 더 이상 철학이 필요 없다. 이곳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죽음까지도 이해하게 되니까. 나는 산을 정복하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다. 또 영웅이 되어 돌아가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새롭게 알고 싶고 느끼고 싶다. 물론 지금은 혼자 있는 것도 두렵지 않다. 이 높은 곳에서는 아무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지탱해 준다. 고독이 더 이상 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고독 속에서 분명 나는 새로운 자신을 얻게 되었다.”

5,000미터 아래의 산을 오르면서 숨 고르기가 어려울 만큼 고산병의 고통을 경험한 바는 있지만, 그들이 죽음의 문턱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절대적인 고독과 정복욕과 영웅심이 과연 어떠한 것인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 절대 고독(검은 고독)이 두려움이 아니라 눈부신 자유(흰 고독)로 전환되는 이 과정을 입을 딱 벌리고 경이롭게 바라보고 찬양할 뿐이다. 메스너는 문명 세계 저 너머의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지에서 우리는 생존 자체를 기적이라 느낀다. 우리의 존재는 마치 예외적인 상태인 것만 같다. 매 순간이 그렇다. 직접 피부로 다가오는 이 느낌이야말로 모든 욕심을 밀어내는 동시에 인간의 가장 생생한 본능을 일깨운다. 우리 삶을 지금까지 지탱해 왔을지도 모르는 환상과 자기기만은 녹아 사라지고 없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마음과 함께 모든 존재에 대한 미칠 듯한 굶주림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라고 말했다.

그 자리의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미친 자들의 빛나는 세계를 잘 이해할 수 없으나, 사지에서의 생존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생존 또한 기적이라는 것, 기적은 반드시 희망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산에 오른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오기를 빌었다. 정상에 대한 집착과 노력을 진심으로 존중하지만, 집에 돌아오는 것이 산에 가는 사람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희망은 산꼭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 아래 이 세상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