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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산인(전종호)

요술공주 셀리 2023. 6. 26. 13:59

기억은 기록을 능가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기록은 누적적이고 영구적이며 전승될 수 있으나 기억은 잠정적이고 피상적이고 단기적이기 때문이다. 영화 <스모크>에는 자신의 가게 앞 교차로 한 구석에서 같은 각도로,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4천여 장의 사진을 찍어 온 가게 주인이 나온다. 어느 날 자신이 찍은 사진들을 한 손님에게 보여 주지만 손님은 비슷한 사진들이라 여기며 빠르게 넘긴다. 그 모습을 보던 가게 주인은 사진들을 천천히 보면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주인의 말에 따라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찍어 그렇고 그런 사진들을 넘기던 손님은 한 장의 사진에 눈이 멈추고 만다. 사진은 몇 년 전 사고로 죽었지만 애타게 그립기만 한 아내의 어느 날 출근 모습이었다. 매일매일 별다를 게 없는 하루의 일상이지만 반복 속에서도 차이는 존재하고 차이는 기록에 의해 증명되는 것이다.

일상이 뜨거워 보이나 차가운 세계라면, 산은 조용한 것 같지만 뜨거운 장소이다. 산은 시시각각 달라지고 오르는 사람도 계속 달라지기 때문에 산의 모습과 경험은 산을 오르고 체험해 본 사람들의 주관적 기억과 기록에 의해서만 체증되고 전해질 수밖에 없다. 기록이 중요한 것이다. 원로 산악인 김영도는 산에 가는 사람과 산에 가지 않는 사람이 있다. 산에 가도 책을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등산을 좋아하고 독서를 즐기면서도 산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이 있고 쓰지 않는 사람이 있다. () 산에는 왜 가고 책은 왜 읽으며 글은 왜 쓰는가? 산에 가고 책을 읽으며 글을 쓰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산과, 산의 경험을 기록하는 사람이 늘어나길 기대하고 있다. 1977년 한국 최초로 정상 등정에 성공한 에베레스트 원정 대장이었던 그는 100세 가까운 지금도 외국 산악 서적을 번역하는 현역 작가이며 '서재의 등산가'이다.

외국과 비교하면, 그리고 8000미터를 등정한 국내 산악인 수에 비하면, 고산 등반에 대한 우리나라 기록물은 많지 않다. 원인을 꼭 집어 말하기는 쉽지 않으나, 첫째 등산 비용의 충당 방법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히말라야 등정은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든다. 원정을 한 번 떠나게 되면 보통 두세 달이 걸리고, 10명에서 20명의 등반대원으로 꾸린다고 하더라도 현장에서 이를 돕는 포터와 고소 등반 포터와 셰르파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몇백 명의 인원이 동원된다. 그러다 보면, 한 번 원정에 수억 원의 돈이 들게 된다. 히말라야 등정 초기에는 나라마다 국위 선양이라는 명목으로 국비를 지원받아 원정대가 조직되는 것이 관례였으나, 차츰 기업의 후원을 받는 형식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등반가 개인이 비용을 조달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기업이나 산악회, 독지가의 후원에 의존한다. 강연 및 비디오 제작 및 저술 활동에 기초하여 등산가 개인이 비용을 조달하는 유럽과는 달리, 기업이나 독지가에 의존하는 우리 경우는 자연히 저술 활동에 매달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 출판시장의 현실과도 관련이 있다. 책을 읽는 사람이 없으니 글을 쓰려는 사람도 없고 출판하려는 사람도 없게 된다. 자기 생각과 자기 삶을 기록할 수 있는 능력 하나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교육 탓도 한몫한다고 할 수 있다.

그건 그렇고, 말이 나온 김에 히말라야가 궁금하거나, 앞으로 히말라야에 오를 사람을 위해 히말라야 트레킹이나 등반을 기록한 책 몇 권을 소개한다.

우선, 거칠부가 쓴 <나는 계속 걷기로 했다>가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서른아홉에 직장을 그만두고 GHT(네팔 히말라야 횡단 트레킹) 5개월간 2165킬로미터 338만 걸음을 기록한 것이다. 우리나라 트레커 중에서 이 코스를, 그것도 완주한 사람은 거의 없다. 네팔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횡단하는 네팔 횡단 트레일(GHT)은 높은 길을 걷는 하이 루트가 있고, 낮은 길을 걷는 컬처 루트가 있다. 하이 루트는 평균 고도 3,0005,000미터로 길이가 1,700킬로미터이고, 대략 160일 정도가 소요되며, 컬처 루트는 2,0003,000미터의 비교적 낮은 지대로 대략 걸어서 100일 정도 걸리는 1,500킬로미터 코스다. 책은 상업적이고 대중화되지 않은 히말라야의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재연한다. 여자 혼자서 말 안 듣는 현지의 거친 남자 포터들을 수완 좋게 다루고 험악한 산악 지형을 헤쳐나가는 멋진 활동들은 덤. 대담한 배포와 인생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등골을 서늘하게 하다가 헛웃음을 자아내기도 하는, 드라이하지만 일기를 기초로 한 기록 중심의 저작이다.

신한범의 <일생에 한 번은 히말라야를 걸어라>는 방학 때마다 거의 20여 차례 쿰부 히말라야와 안나푸르나 일대를 트레킹 하면서 만났던 인연들과 설산의 감동,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여행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히말라야에 대한 정보와 고산준령을 걷고 오르면서 느꼈던 경험과 네팔과 그 문화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다. 어디서 어디까지 가봤다, 가다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었다는 식의 다른 답사기와는 달리 개인적 소감과 문학적 표현이 넘친다. 장엄한 설산을 보면서 자신의 왜소함을 느끼기도 하고 홀로 개울가에 앉아 물속에 잠겨 있는 돌을 꺼내 만지작거리는 소년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티베트 성자 밀레라빠는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의 반은 성취한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히말라야로 떠났지만, 무지한 나는 히말라야를 걸었지만 깨달음은 없었다.”는 고백은 자기반성이기도 하지만 이런 고백이야말로 히말라야를 찾아서 얻게 되는 깨달음의 수준이 아닐까? “히말라야와 한 번 관계를 맺게 되면 히말라야를 몰랐던 이전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 "트레킹을 위해 가지만, 걷고 있는 곳은 산이 아니라 인생이었다.", "히말라야를 걷지 않은 사람은 많아도 한 번만 걸은 사람은 없다.", "나는 지금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을 걷고 있는 것이다." 등등 독자를 꼬시는달달한 글귀들이 책 중간중간에 숨어 있다. 내가 히말라야 입구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순전히 이 책의 꼬임 때문이었다. 꼬임에 빠진 것은 낭패가 아니라 내게는 큰 축복이었다.

임현담의 책들은 히말라야를 소개한 책 중에서 압권이다. 임현담은 현직 의사로 1년에 한 달씩은 히말라야에 체류하는, 히말라야를 드나들면서 가톨릭에서 불교로, 그리고 마침내 힌두교 신앙자로 종교적 정체성을 바꾼 말 그대로 히말라야의 숭배자이다. 그는 인도에 관한 여러 저서와 함께 <시킴 히말라야>, <네팔 히말라야>, <가르왈 히말라야>, <강린 포체>, <은빛 설산> 등을 펴냈다. 특히 그의 <히말라야 있거나 혹은 없거나>는 히말라야의 인문, 지리, 종교, 철학 등을 기술한 빼어난 저술이다. 책은 산은 신이 머무는 곳이 아니다. 산 전체가 신이다. 와서 보라.”라는 말로 시작된다. 단순한 여행안내서가 아니라, 히말라야의 모든 생명체, 하늘과 길, 추위와 더위, 바람과 물을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차원에서 풀어낸 인문학적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히말라야의 깊은 영감을 저절로 불러오는 책으로,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서 설명은 여기서 생략. 궁금하면 읽어 보시라.

히말라야 고소 등반의 경험을 담은 책으로 엄홍길의 <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이 있다. 그의 이름 앞에 붙은 히말라야 탱크라는 말 뒤에 가려진 수많은 등정 실패의 경험, 그와 함께 한 동료들의 죽음과 사고가 낱낱이 기록되고 있다. 사실 이 책은 성공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실패의 기록에 더 가깝다. “1989년부터 1993년까지 나는 히말라야 8000미터급 봉우리에 6번 도전했다가 모두 정상을 밟지 못했다. 단 한 번도 8000미터를 넘어서지 못하고 무릎을 꿇어야 했다. 나는 번번이 깨져서 돌아왔다.”, “산다는 게 모험이라면 내게 있어서 도전과 모험은 오직 8000미터를 오르는 것이었다. 모험을 감행하지 않는 나는 살아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다섯 번 실패하고 여섯 번째로 8000미터를 오르기 위해 떠난 낭가파르바트에서, 나는 또다시 실패의 사슬을 끊어내지 못하고 돌아왔다. 여섯 번째 실패의 결과는 참담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살의 일부를 도려내는 아픔을 맛봤다. 동상에 걸린 오른쪽 발가락 두 개를 잘라냈다.” 산에 미친 사람들의 실패와 성공의 뒷담화에 목덜미가 서늘하다.

나는 나의 첫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의 경이와 감동을 30여 편의 시로 써서 시집 <가벼운 풀씨가 되어도 좋겠습니다>로 묶었다. 펼칠 때마다 그때의 감동이 새록새록 물결쳐온다.

산악 등반의 경험을 알리는 글은 뒤에 산을 오를 사람을 위해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글이야 본인이 직접 쓰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전문 작가들의 대필 또는 대화, 구술을 통해 남긴다고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버나데트 맥도널드 같은 전문 산악 작가들에 의해 아름다운 선을 찾아 나선 알파인 스타일리스트 보이테크 쿠쿠츠카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 않은가? 산에서나 산 아래 세상에서도 연륜 있는 어른들이 갈급한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