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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삶을 가른다(전종호)

요술공주 셀리 2023. 7. 7. 09:49

지금 걷는 길은 직선이지만, 돌아보면 끝없이 굽이굽이 돌고 도는 길이다. 산비탈을 탔다가 산모퉁이를 돌면 계곡 아래로 빠지고 자그마한 나무다리나 징검다리를 건너면 다시 비탈로 이어지는 식의 길을 오늘 삼십 리쯤 걸었다. 문명이 직선이라면 자연은 곡선이다. 사실 문명이란 자연의 곡선을 굳이 직선의 길로 바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뱀부에서 치고 올라오니 호젓한 고갯마루에 무인 롯지가 있다. 먹을 것 몇 가지, 마실 것 티백 몇 가지 있어 알아서 먹고 알아서 돈을 내고 가는 곳이었다. 여기서 보니 올라온 마을과 가야 할 마을이 개 짖는 소리가 들릴만큼 빤한 거리처럼 보인다. 뱀부에서 만난 롯지 샤우지가 자기들은 2시간이면 툴레 샤부르까지 간다고 했는데 내 걸음으로는 족히 5시간 이상은 걸렸다. 축지법이야 쓰겠냐마는 몸도 작고 살도 없는 네팔리들이 이곳 산지에 최적화된 신체와 심장을 가졌다면, 쓸데없는 살과 허약한 근육 덩어리인 이 문명화된 몸은 얼마나 시원치 않은 존재인가?

마소나 사람만이 다닐 수 있는 길고 굽은 길은 결국 산 깊은 곳까지 들어와서야 겨우 출렁다리에 의해서 마을로 연결되었다. 문제는 사실 여기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었다. 상식처럼 마을이 평탄한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 입구의 집에서부터 산꼭대기까지 집들이 다랑이 논처럼 계단식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마을 꼭대기에 있는 롯지까지는 거의 100미터를 더 올라가야 했다. 마을에 도착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는지 몸이 퍼져서 더 이상 올라갈 수가 없다. 마을 길도 지금까지 올라온 길처럼 지그재그로 올라간다. 산에서는 섣부른 안도감은 금물이다.

롯지는 이번 트레킹 코스에서 최상급이었다. 실내에 화장실이 있고, 양변기며 뜨거운 물이 나오는 샤워기도 있고 텔레비전도 있다. 와이 파이도 팡팡 터진다. 핸드폰을 켜니 갑자기 세상의 소식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집에 연락을 하고, 문자를 확인하니 교육청에서 급한 메시지가 와 있다. 인사서류에 몇 가지 정보가 누락되어 있다는 것이다. 서류를 수정할 수 없는 곳에 와 있으니, 미비점 때문에 불이익을 받아야 한다면 감수하겠다는 문자를 인사담당자에게 보낸다.

편한 곳에 도착하니 잠이 쏟아진다. 씻고 잠시 조는 사이 식사를 하라고 부엌에서 불러서 가니 뚱바가 있는데 좀 마시겠냐고 묻는다. 뚱바는 창과 함께 우리 막걸리 같은 술인데, 뚱바는 좀 시큼한 맛이 난다. 뜨거운 물을 부어 서너 번 더 계속 우려 마실 수 있고 빨대를 끼워 빨아먹는 것이 특징이다. 락시가 소주처럼 증류한 맑은술이라면 뚱바는 기장(꼬도)으로 발효한 술이다. 그동안 산에 올라와 고산병을 염려해서 일부러 술을 멀리 했는데 긴장이 풀린 탓인지 은근히 당긴다. 주인장이 야크 고기 몇 점을 썰어온다. 약간 떫은 듯한 술맛을 오랜만에 즐긴다. 고산 지대의 추위 때문일까 이곳 사람들은 남자 여자 구분 없이 뚱바와 창을 즐겨 마시는 편이다. 몽롱하고 아늑한 하룻밤이 지났다.

아침에 일어나니 예상했던 대로 큰 눈이 와 있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아직도 눈은 계속 내리고 있다. 등산화가 빠질 정도, 대략 2030센티 정도는 온 것 같다. 계속 올라가야 할 것인가 여기서 하루 더 머무르며 날씨를 살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위 마을의 상태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올라가기로 한다. 다랑이 식 지그재그 길은 계속되고, 눈길이라 가는 길은 어제보다 힘들고 단조롭다. 상록의 나무들도 눈 속에 묻혀 세상은 온통 백색이다. 서너 시간을 더 걸어 무카르카(2999m)에 도착했다. 코인사쿤드로 올라가는 길과 툴레샤부르와 싱 곰파로 내려가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였다. 로마에서는 트레비스라고, 그 유명한 삼거리 분수가 있던데, 이 삼거리 고갯길에는 분수가 아니라 롯지 두 채만 있었다. 영업을 하고 있는 한 집에 들어가 점심을 주문하고 앉는다. 올라올수록 눈송이가 커지더니 이제 아예 퍼붓듯이 온다. 포터가 계속 묻는다. 갈 건지 말 건지. 네 생각은 어떠니 되물으니 내 뜻대로 하란다. 이 나라가 카스트의 나라인지라 포터들은 대개 자신을 고용한 트레커의 의견에 복종하는 경향이 있다. 방에 침대가 남아서 함께 자자고 해도 부엌에 나가서 자고,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해도 웬만해서는 여행객들과 함께 한 상에 앉지 않는다. 내 아들과 같은 나이라 잘해주려고 해도 거리를 둔다. 롯지 샤우지에 물으니 네팔리라면 갈 수 있는데 코리안은 더 갈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 너희는 갈 수 있는데 우리는 왜 갈 수 없느냐 물으니 몸이 다르다고 한다. 여기서 하루를 묵고 내일 아침 눈 상태를 보고 코인사쿤드까지 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기로 한다. 말 그대로 발이 묶인 것이다.

 

아침에 산에 올라올 때까지는 몰랐다

어제까지 길이 순조로웠던 것처럼

오늘도 계획대로 잘 될 줄 알았다

고갯길을 수백 번을 돌고 돌아

2999미터 무카르카에 와서 눈에 갇혔다

무릎까지 발은 빠지고

온통 안갯속에 산은 길을 숨겼다

하루를 묵으며 기다리기로 했지만

내일이라고 길을 내줄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확실한 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어

길을 막으면 기다릴 수밖에 없다

사람이 도모하는 일들은 결국

하늘이 허락해야 한다는 것

오늘 산중에서 배운

우연한 겸허의 학습이다

- 산중 학습

 

우리는 인생을 계획해서 산다. 어렸을 때의 시간은 24등분의 동그라미 속에 있었다. 방학이 시작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하루 시간표를 짜는 일이었다. 기상해서 취침할 때까지 계획은 한 시간 또는 30분 단위로 분할하여 조직되었다. 물론 예상대로 시간이 항상 집행된 것은 아니었지만, 인생의 장기 계획도 그런 식으로 짜였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이렇게 학교 단계별로 짜이거나 청년, 장년, 노년기 등 발달 단계에 따라 해야 될 일이 계획되었다. 거기에다 친절한 심리학은 삶의 단계마다 해야 할 발달과업까지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산에 와서도 시간 계획을 짠다. 전체 일정을 짜고, 또 하루 일정을 계획해서 점심때까지는 어디까지 가고, 목표지에는 몇 시까지 도착하고 가면서 어디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고 준비해야 하는 것까지 세세하게 일정을 짠다. 이를 위해서, 기상, 조식, 출발을 6-7-8 법칙에 따라 한다.

모사는 사람이 하여도 경영은 신이 한다는 말이 성경에 있다. 예상치 않은 날씨가 계획을 멈춰 세우고, 사고나 질병이 인생의 발길을 주저앉히기도 한다. 이런 일이 산에서만 일어나기야 하겠는가마는, 우연이 아니라면 3000미터 산중에서 이름 모를 소녀가 해준 기막힌 파스타 맛을 어찌 맛볼 수 있었겠는가? 삶을 가르는 것은 결국 우연이라는 것을 산중에서 배운 긴 하루가 가고 있었다.

 

식사 준비는 열네 살 소녀가 했다

눈에 갇혀 갈 길을 포기한 무카르카에서

며칠째 계속되는 커리 향을 피하기 위해

이탈리아 음식을 주문했는데

어미는 티베트 수예 직조에 여념이 없고

이탈리아는 그만두고 제 나라 서울이나

읍내도 가보지 못했을 소녀가

스파게티 요리를 했다

이탈리아가 세상에서 어딘지도 모를 아이가

가끔씩 들리는 이탈리아 여행자를 위하여

어디선가 누구에선가 소문을 듣고

대강 배운 스파게티 칠리 갈릭 소스는

뜻밖에 맛이 있었다

지난봄 로마의 스파게티 못지않았다

원산지라고 항상 최선은 아니다

눈 덮인 산등성이 오두막 두 채

히말라야 오지에서도

맛은 늘 진화하고 변화되기 때문이다

소녀의 소박한 커피는

트레비 분수 앞 에스프레소만은 못했지만

팁을 받고 수줍게 좋아하는 모습은

에스프레소처럼 티 없이 맑고 달았다

- 무카르카 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