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과 시각, 그리고 튜닝(전종호)
어쩌다 눌노리 19
얼마 전에 평론가 황산의 <나의 눈길은 따뜻한가>를 읽었다. 세상을 인식하는 첫 단계가 시선, 눈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많은 감각기관이 있지만, 눈에 의존하는 비율이 가장 크고 이것이 정신적 인식의 기초가 된다.
마을의 토목 공사를 앞두고 우선 현장 부근의 주민과 어른들께 인사를 다녔다. 공사 개시와 공사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불편에 대한 이해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마을의 입지 조건과 지역 현황 등을 알아보고 공부했으나 마을 주민을 직접 만나 뵙는 것은 처음이어서 마을 주민이 어떤 분들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마을 주민들 역시 누가 여러 명이 와서 집을 짓는다던데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했다고 하셨다.
가까이 있는 교회 목사님께도 찾아가 인사했다. 목사님도 누가 집을 짓고 이사를 오는지 궁금해하셨다. 무슨 공동체가 온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사이비 종교집단이 아닌가 걱정을 했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웃음과 함께 현타. 우리는 이 마을에 와서 이웃들과 함께 더불어 살 계획들을 꾸미고 있는데, 이들은 이런 걱정과 함께 기대가 아니라 일종의 불안 속에 있었구나.
한 번의 대면과 대화도 없었던 사람이 서로 가질 수 있는 당연한 문제들이지만 서로의 시선을 확인하고 이해시키는 것이 우선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촌에 돌아오는 사람들의 텃세에 대한 하소연이 떠올랐다. 농촌에 와서 5년을 살고 10년을 살아도 외지인은 외지인이라는 푸념들이 다시 생각난 것이다. 텃세도 텃세려니와, 이들에게 동화되고 하나 되는 것이 숙제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서로에 대한 시선과 시각을 맞추는 일은 원주민과의 문제만은 아니다. 15 가구 어른만 약 30명이 다 되는 우리 입주민들끼리의 시각 조정도 작은 일이 아닐 것이다. 생태주의니 평화니 공동체니 하는 큰 문제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항상 디테일에 있듯이 각자 살아온 배경도, 연령도, 직업도, 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 이웃을 이루고 공동의 농사일을 하고 마을 일을 상의하고 해결해 나갈 때 생기는 작은 갈등과 상하는 빈정을 치유하는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지 않던가?
앞에서 말한 핀드혼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들었던 교감과 튜닝의 중요성이 떠오른다. 노동 공동체이기도 한 핀드혼에서는 하루의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함께 일하는 사람들끼리 손을 잡고 눈을 맞추고 마음의 튜닝을 한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이 회의하는 장소가 실내든 실외든 서클 형식의 자리 배치를 눈여겨보았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회복적 대화모임이 보급되면서 대화 서클이 많이 진행되고 있는데 인디언식 대화모임이 여기서도 이미 오래전에 도입된 것이었다. 성미산 마을에 사는 딸의 경우에도 집을 짓고 공사하는 도중에 6가구 12명의 어른들끼리 대화 훈련을 하는 것을 여러 차례 지켜보았다. 낯선 사람끼리, 아는 사람이라도 지근거리에 살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형식적이고 공식적인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대화는 자연적 현상이기도 하지만 훈련과정이기도 하다. 밥상머리 교육이 없어진 현대사회는 대화가 교육이어야 한다. 요즘 사업으로 유행하는 리더십이나 코칭 훈련도 알고 보면 말하고 듣기 훈련과 다름이 아니다. 현지인의 텃세나 이주민의 허세니 하는 문제도 결국 시선과 시각, 대화의 문제에서 발생한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관계에서는 말이나 논리가 폭력이 되기 쉽다. 주민들끼리는 거대담론이나 치열한 논리가 아니라 따뜻한 말 한마디와 눈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황산의 말처럼 우리는 시선을 통해 그 무엇을 바라보면서 그 사물과 사람을 객체화한다. 나와 타자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상대방을 사로잡으려는 '시선의 투쟁'을 벌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불편의 시선 넘어 따뜻한 화해의 시각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마을 조성의 첫 번째 일은 따뜻한 시선을 주고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