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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사의 건축 일기 쓰기(전종호)

요술공주 셀리 2023. 8. 18. 08:56

어쩌다 눌노리 41
 
4월 19일 딸과 손녀까지 데리고 2차 미팅을 갔다. 설계 계약을 정식으로 한 날이다. 도면 없이 특별한 주제 없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지음 아키씬 건축사사무소는 서촌의 가정집을 사서 1, 2층을 사무실로 쓰고 옥상옥으로 또 하나의 공간을 만들었는데 우리는 그리로 안내되었다. 그곳은 바닥을 제외하고 5면에 볕이 들어오게 만든 선룸이었다. 공간은 밝고 투명했으며 무엇보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자 탄성이 나왔다. 인왕제색도가 내 눈앞에 쫘악 펼쳐졌기 때문이다. 인왕산이라니. 어릴 적에 지금 바라보는 인왕산 반대편의 모습을 늘 보았었기 때문이다. 인왕산은 바위산이고 맞은편에 있는 안산은 숲이 깊은 산이다. 안산은 어렸을 적에 메뚜기 잡는 오빠를 따라 오르내렸던 산이다. 혹은 친구들과 함께 아카시아 꽃을 따먹으며 가위 바위 보 하며 아카시아 잎을 떨구며 오르던 산이었다. 인왕산에서는 굿마당이 있어 자주 굿소리가 들렸는데 어린 나이에 무서워 오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러나 굿을 지낸 흔적의 촛농, 흩어진 쌀알, 오색 끈들, 팥 시루떡 등의 기억이 선명한 것을 보면 오르긴 올랐었던 모양이다. 아득한 세월을 잠시 건너는 찰나를 맞았다.
 
계약을 하고 도면 없이 만난 것이라 특별한 것은 없었다. 미팅 전에 건축사가 보내준 파일을 꼼꼼하게 읽고 갔으며 나 또한 받은 설문에 성의를 다해 답했기 때문이다. 태어나 처음 집을 짓기로 하여 막막하기만 한 우리에게 건축사 내외는 자신들이 만나 왔던 클라이언트들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막막함이 벗겨지기도 했지만 고민도 시작되었다. 우리들의 두서없는 꿈도 들어주셨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의 로망인 불멍 때리기 페치카, 다락방 천창으로 밤 별 만나고 소나기 맛도 느끼는 등의 구름 위를 걷는 이야기 말이다. 꿈의 말은 적정 높이와 부피 제한 없이 마구 부풀어 올랐다. 미팅 말미에 함 소장님은 이런 말씀을 주셨다. “건축하기로 마음을 먹고 실제 건축이 시작되기 전이 건축주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들입니다. 매일 일기를 써보는 것을 권장드립니다.” 수업을 마치는 선생님의 말씀 같았다. 대화도 했고 설문지에 답했으니 그것을 기본으로 알아서 설계하시겠지 라는 우리의 생각을 눈치채시고 숙제를 내주신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를 쓰려고 해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 내가 구입한 땅의 모양새를 쳐다볼 뿐이었다. 우리 집과 옆, 앞, 뒤의 공간들을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출입구는 어느 쪽이 좋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게 되고, 마당을 가로질러 실내로 가겠지... 하다가 마당? 커다란 마당이 아니라 작지만 뒤에 습한 뜰을 두는 건 어떨까? 어릴 적 외갓집 뒤뜰의 모습이 선명히 살아났다. 이런 등등의 생각이 연속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집 짓기에 관한 책을 주문도 하고 도서관의 대출이 시작되면서 꿈의 일기 쓰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