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뚤빼뚤 글쓰기

다시 강원도

요술공주 셀리 2023. 8. 19. 11:43

새벽 1시에 손주와 놀고 있다.
말을 붙이면 옹알옹알 대답을 하고, 책을 읽어주면 곰돌이를 보고 웃어주니 이 또한 신세계다.  그새 할머니를 알아보는지 나의 동선을 따라 눈과 고개가 돌아가니, 손주를 안고 재우느라 팔이 아파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아기들은 잠드는 방법을 몰라서 힘들게 '재워야'만 한다는데, 새벽 5시에 아이를 안고 서성이는 며느리를 보니, 참 안타깝기도 흐뭇하기도 하다. 피곤하고 힘들 텐데 짜증 하나 없이 먹이고, 재우고, 아이 자는 틈틈이 청소하고 집안 일 하는 며느리가 대견하고, 사랑스럽다.

지하철 타고 가겠다는데 굳이 버스터미널까지 태워다 준 아들 덕분에 넉넉히 휴식을 취하고 버스를 탔다.
버스의 진동소리에 스르르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강원도다. 

겨우 1박 2일이 지났을 뿐이다.

어제 본 낯익은 풍경임에도 새롭고 반갑다. 부모님 댁에 먼저 들러 안부를 여쭙는데, 딸이 서울 갔다 온 일을 그새 잊으셨다. "빨리 배추 모종을 사 오라."고 채근부터 하신다. 엊그제 심은 모종 절반이 강한 햇볕에 타버렸기 때문이다. 딸의 외출은 잊으셨는데 배추 모종 타버린 건 기억하시는 엄마에게 윗집에서 얻어온 새 모종을 갖다 드리니 "빨리도 사 왔네." 하시며 밭으로 가신다.

 

 

 

겨우, 옷을 갈아입고 서울 다녀온 짐을 정리한다.

식빵과 계란은 냉장고에, 작은 아들이 인도에 다녀오면서 사다 준 비누와 핑그솔트, 안과 약 등을 정리하고 나서야 초록을 돌아본다. 동, 서, 남, 북 한바퀴를 돌아보면서 아, 강원도구나 한다. 사방이 초록! 숲으로 둘러 싸인 집에 왔음을 실감한다. 이 맛에 여기에 살고 있다. 꽃범의 꼬리, 벌개미취, 연보랏빛 상사화도 어제보다 더 활짝 핀 것 같다. 여름 내내 피어 있는 백일홍과 천일홍도 반갑고, 흔한 메리골드도 오늘따라 더 예쁘다. 뜨겁던 해님도 서산으로 돌아가고 일상의 평화가 초록 위로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