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치에서
"언니, 이사 축하해."
옆집으로 이사 왔다고 함박웃음으로 반기는 동생이 흰색 벤치를 낑낑대며 들고 왔다. 5년 전 일이다. 마음에 쏙 드는 프로방스풍 예쁜 벤치여서 베란다에 놓았다가, 잔디밭에 두었다가, 데크 위에 놓고 애용하기를 5년째. 벤치는 비와 바람, 눈을 온몸으로 버텨내다가 그만 녹이 슬어, 수술을 하기에 이르렀다.
수술은 남편이 집도. 굵은 사포와 끌로 녹을 모두 볏겨내고, 페인트 리무버 작업에 이어 방청 페인트를 칠했는데, 남편은 이 두 가지 작업이 제일 힘들었다고 한다. 화학 성분의 페인트 리무버 작업은 눈조심, 피부 조심을 해야 할 만큼 거친 작업이었는데, 신나(thinner) 냄새는 그렇다 치더라도 습하고 외진 창고에서 일하다가 남편은 지독한 벌레에 물려 병원까지 다녀왔었다. 알레르기 약 또한 지독해서 낮에 먹으면 졸음이 쏟아지니 '벤치 살려내기' 작업은 1달 내내 우리를 괴롭히는 존재가 되었다.
1차 에나멜 페인트를 칠하고 나서, 남편이 무척 속상해했다.
방청페인트 까지는 완벽하게 표면을 매끄럽게 잘 마무리 했는데 덕지덕지 발라진 에나멜페인트로 표면이 울퉁불퉁해졌다며 심통이 난 것이다. 급기야, "난 안 해, 당신이 마무리해 줘." 하고 붓을 던져버린지 2주일이 지났다. 난 지독한 벌레에 물릴까봐 창고에 가기 싫다. 그래서 벤치는 방치된 채, 다시 2주일이 지나갔다.
그런데, 추석이 가까와질수록 마음이 설렌다.
아들이 매일 보내주는 손주 사진과 동영상은, 보고 또 봐도 더 보고 싶으니 이건 또 뭔 조화란 말인가? 명절이라야 아들네만 내려오는데도 '소 꼬리'를 사서 냉동실에 넣어 놓고, 틈틈이 데크에 스테인을 칠하고 있다. 겨우 6개월이 된 손주를 위해 사슴 한 마리도 데려오고, 쉽지 않은 녹슨 벤치를 리폼하고 있다.
남편이 벤치를 벌레 없는 안전한 데크로 옮겨 주었다.
그러니, 오늘은 나의 실력을 발휘해야겠다. 울퉁불퉁한 표면을 매끄럽게 고쳐야겠기에 꼼꼼히 살펴보니, 초벌 에나멜 칠은 붓이 문제란 걸 알아냈다. 쇠로 만들어진 표면에 플라스틱 붓은 거친 붓자국이 그대로 남으니, 당연히 울퉁불퉁 요철이 생길 수밖에. 그래서, 부드러운 수채화붓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페인트를 묻혀 살금살금 칠 해보았는데, 우와! 성공이다. 페인트가 잘 묻고 표면도 매끄럽다.
룰루랄라! 페인트 냄새, thinner 냄새가 진동을 하지만, 이왕 하는 일.
콧노래도 부르고 휘파람도 불면서 신나게 붓질을 한다.
기분이 좋다. 벤치에 흰색 페인트를 칠해 놓으니 우아한 왕비 의자가 되었다. 매끈한 벤치를 바라보며, 나라를 구한 사람처럼 흐뭇하고 대견해 한다. 이러니, 손으로 하는 일, 몸으로 하는 노동의 달콤한 결과가 나는 좋다. 남편과 나의 수고로 새로 태어난 벤치. 반짝반짝 빛나는 새 벤치에서, 가을을 만져본다. 따뜻하고 풍성한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