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제발
언제부턴가 엄마의 손 끝이 달라졌다.
손 끝이 야무져서 요리도 천재요, 웬만한 옷은 직접 만들어 입고, 무용대회에 나가는 딸의 한복도 직접 만들어 주시던 엄마다. 살림요정이었던 그런 분이 살림을 놓은 지 오래. 농사를 짓는 일은 좋아하고 즐기시나, 보관하고 마무리하는 일은 나 몰라라 하시니, 뒷일은 늘 내 차지. 그런 엄마가 나는 힘들다. 잠시도 한 눈 팔 틈이 없어서다.
정년을 했는데도 나는 날마다 출근을 한다.
출근지는 바로 엄마 집. 하루라도 출근을 거르면 꼭 일이 터지니, 결근할 수밖에 없는 날은 도무지 불안하고 걱정이 된다.
'부지런함'이 몸에 밴 엄마는 새벽부터 밭이나 꽃밭에서 늘 일을 하신다.
봄엔, 땅콩이며 상추며 온갖 채소를 심고 씨를 뿌리는데, 엄마 머리에 기억된 작물만 심어야 한다. 작년에 심은 고추가 탄저병으로 50여 그루 모두 전멸을 했었다. 전문 농사꾼도 제일 힘들다는 고추농사여서 올핸 다른 작물을 심기로 했다. 그런데 그걸 기억 못 하는 엄마가 고추모종 안 사 온다고 봄 내내 딸을 힘들게 하셨다.
코딱지만 한 땅도 용케 찾아내어 옥수수며 콩을 심는 엄마는 빈 화분에도 팥을 심으셨다. 봄엔 곱다 하고 서부해당화를 좋아하다가도, 해당화 가득 호박넝쿨이 올라가면 그땐 호박을 더 귀히 여긴다. 질긴 호박넝쿨로 은행나무가 죽어나도 나무엔 도통 관심 없는 엄마다.
요샌 가을걷이를 하느라 조석으로 밭에 계시는데, 서리가 내리기 전에 수확한 갖가지 작물을 집안 구석구석 쌓아 놓고 계시다. 깻잎과 콩, 그리고 팥. 고추며 땅콩, 호박 등 엄마 집은 수확한 작물들로 마치 농산물 전시장 같다.
그런데 엄마는 딱 여기까지다.
심고, 가꾸고, 수확하는 일 까지. 보관하고 마무리하는 일, 더구나 요리는 싫어하시니 나머지 처리는 모두 내 차지. 재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썩거나 상해서, 아깝지만 버릴 수밖에 없다. 깻잎이 그랬고 팥도 그랬다.
살림 요정이던 엄마가 치매가 오면서 공주님이 되셨다.
식사와 살림은 딸이 챙겨주고, 약이며 웬만한 의식주는 또 아버지가 챙겨주신다. 아버지가 커피를 타 드리면 맛있다고 잘 드신다.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기도 전에 아버지가 엄마의 잔을 갖다 설거지까지 해 주시니, 엄마는 점점 애기가 되어가고 있다. 건강하고 힘도 센 애기가 엄마다. 그런데 이상하게 씨 뿌리고, 가꾸고, 수확하는 바깥일은 오케이. 요리하고 보관하는 일은 집안일이어서 노땡큐라니......
어제도 '서리 내리기 전'에 해야 한다고 밖의 화분을 모두 집안으로 옮겨 놓으셨다. 그러는 동안 나는 냉장고의 상한 음식을 치우고, 상한 농작물을 엄마 모르게 버려야 했다.
"엄마, 제발 적게 심고, 하지 말자는 딸의 말 좀 들어주세요."
"엄마, 제발 콩이랑 팥을 냉장고에 넣어주셔요." 하면, "니가 하면 되잖아."하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르르 화를 내시던 엄마가 영혼 없이 말씀하신다.
"난, 싫어. 밥 하기 싫어."
힘도 없어지고, 손 끝도 무디어지고, 의욕도 없어진 아픈 엄마.
"엄마. 밥 안 해도 좋고 일거리 많이 만들어 주셔도 좋으니 더 아프지만 마셔요, 제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