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우리 큰언니(최현희)

요술공주 셀리 2023. 10. 19. 09:44

어머니는 초등학교 큰딸 성적표 장래 희망난에 교육부 장관이라고 쓰셨다 했다. 어느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어머니도 큰딸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셨던가 보다. 집안의 19대 종부라는 엄청난 무게에도 시골 냇가로 봄가을 소풍 오시는 선생님들에게 갖가지 음식을 대접하셨고, 학예회 때 고운 한복을 손수 지어 입혀 큰언니를 무용대회에 내보내셨다. 매일 사랑방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시조를 읊으시는 할아버지의 술 시중을 드시면서도 아침마다 큰딸을 곱게 화장시키고 예쁘게 만든 원피스를 입혀 학교에 보내곤 하셨다니, 젊은 시절 큰딸에 대한 그 열정이 참으로 남달랐던 것 같다.

하지만 어머니의 큰 기대와 달리 그 시대 우리 큰언니도 큰딸은 살림 밑천라는 속설에서 비껴가지 못했다. 큰오빠와 막내 남동생, 그리고 가운데로 딸 다섯이었던 우리 집도 큰언니가 살림밑천이긴 마찬가지였다. 농사일과 바느질하시는 어머니를 대신해 막내 남동생을 돌보느라 학교 수업 절반을 빼먹어야 했고, 대학에 가야 하는 오빠와 줄줄이 딸린 동생들 때문에 진학을 포기해야 했으니 분명 우리 큰언니는 우리들의 소중한 밀 알이었다.

큰언니는 막내 남동생이 태어난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두운 새벽 엄마의 산통으로 당시 12살이었던 언니는 바로 앞집 왕진을 다니시는 할아버지한테 가서 엄마가 아기를 낳으려고 한다는 심부름을 했단다. 아버지의 당숙모셨던, 할머니가 질부가 아이 낳으려 한다고 빨리 가보라고 할아버지를 깨우자 질부가 아들 낳는데 왜 깨우냐며 꿈에서 질부가 아들 낳는 꿈을 꾸셨다는 전설 같은 얘기를 큰언니는 우리에게 들려줬었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집에 와 갓 열 살을 넘긴 큰 언니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물을 데워 엄마의 출산을 도왔다는 일화는 아득히 먼 나라의 애처로운 이야기처럼 들렸다.

막내 남동생이 태어난 이후, 넷째인 나와 여동생도 12살 어린 나이 큰언니의 차지였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일은, 밤마다 동생과 나는 가운데 큰언니의 양팔을 베고 누워 서로 자기를 쳐다보라고 언니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리면서 아옹다옹했었다. 그때마다 큰언니는 짜증 한번 내지 않고 너그럽게 얼굴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번갈아 돌리며 남동생에게 엄마 품을 일찍 빼앗긴 어린 여동생들을 소중히 품어주었다. 큰언니의 품에 익숙했던 우리는 언니가 없으면 허전해서 잠을 이루기가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큰언니는 어쩌다 낮에 친구들과 놀 시간조차도 덩치가 큰 셋째 동생까지 업고 고무줄 놀이를 했다고 한다. 동생을 포대기로 둘러 등에 업고 동생 얼굴에 흙먼지가 하얗게 쌓이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고무줄 위에서 흙먼지 일으키며 팔짝팔짝 뛰놀다가 야단맞았다는 언니의 일화는, 1960년대 그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긴 슬픈 여운을 남긴다. 대식구 아침 준비하시느라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매일 아침 학교 갈 때마다 언니는 나의 긴 머리를 양 갈래로 묶어 올리고 다시 각각 길게 땋아 동그랗게 말아 올려 묶어주었다. 그 당시 책받침에 있던 어떤 여자애 사진과 똑같았던 그 머리모양이 싫어 투정해도 어머니가 언니에게 그러셨듯이 얼마나 예쁜지 한번 보라고 거울을 들이밀며 그 일을 굽히지 않았었다.

또한 큰언니는 엄마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뒷동산 너른 콩밭에 풀 뽑으러 여러 자녀들을 줄줄이 데리고 나간 어머니는 각자 한 고랑씩 지정해 주시곤 하셨는데, 작은 언니는 밥 해온다하고, 나와 동생은 중간에 꾀부리며 해찰해도 셋째언니와 큰언니만은 든든히 옆에서 끝까지 밭의 풀을 다 뽑고 어둠 껌껌한 시골길을 걸어 엄마와 함께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팔남매의 맏이셨던 아버지는 오빠와 큰언니 또래의 남동생들을 두고 있었기에 큰딸의 학업을 중단시키셨는데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와 많이 싸우셨고 오빠도 동생들 때문에 본인 자녀의 학업을 중단시키는 사태를 이해할 수 없어 몹시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런 큰언니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 배운 만큼 잘 벌고 잘사는 동생들에게 시샘할 법도 한데 불평 한 번 들어본 적 없다시며 큰언니만큼 너그럽고 배포가 큰 사람은 없다시며 늘 고마움과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큰언니는 대담하고 씩씩하고 늘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오랜 병석에 계신 형부가 걱정되고, 전반적인 생활형편이 걱정되어 조심스레 전화하면 생활전선에서 힘겹게 일하면서도 언제나 씩씩하게 주어진 삶을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모습을 들려주었다. 언니는 누굴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고, 힘들다거나 어렵다고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화를 건 사람이 위안과 용기를 얻는 경우가 더 많았다. 참으로 강인하고 멋진 여인이었다.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오히려 감사할 줄 알았고, 무척 행복해하였다. “힘들게 살아서 오히려 지금 감사한 줄 안다며 어려웠던 시절을 되레 고마워했다. 착실하고 효자인 두 아들이 그 어렵다는 공사에 합격했을 때는 두 팔을 휘젖으며 감사하다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오래전 우리나라 많은 장녀들이 그랬둣이, 우리 큰언니의 고귀한 희생이 밑거름되었기에 지금 우리 형제들과 자녀들이 다른 사람들과 뒤지지 않고 나름의 열매들을 맺고 잘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사신 우리 큰언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20231013일 중앙교육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