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밤 3(이응우)
'자연미술'이라고 하자!
고승현 : 오늘은 ‘야투’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하여 여러분들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돌아가면서 이제까지 참여하면서 느낀 점이나 문제점에 관하여 이야기해주시기 바랍니다.
고현희 : 지난번 ‘모’현장전에 참관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전시를 보고 우리가 하는 작업이 순수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자연에 행한 행위는 대단히 못마땅했다.
이동구 : 순수란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야투’의 자연과의 동행이라는 성격은 불분명한 것일 수 있다. 나는 ‘야투’의 자연보호적 입장에 대해 회의적이다. “나무에 압핀을 꽂는 행위조차 조심스러워한다.”는 태도, 이것은 ‘야투’의 범위를 축소 시킨다.
고승현 : 창립 당시를 생각해 보더라도 우리들의 작업은 자연적이었다. 작품의 명제들만 보더라도 그렇다. “선으로, 올라가, 계단에서, 새 발자국(자취) 등등...” 우리는 사계절의 변화에 순응하는 입장이다. 역설적인 것도 있지만 자연과 동행한다고 해서 범위가 좁아진다고 생각하기엔 자연의 변화가 무궁하다.
이동구 : 자연과 동행하는 것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고승현 : 작가의 양심에 달려있다고 본다.
이동구 :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야투’의 태도라면 ‘자연에 대해 아무런 행위도 해서는 안된다.’란 말을 주변 사람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고승현 : 그것은 억지다!
이동구 : 자연과 동행하는 것은 자연보호적 입장으로 생각하는 것이므로 범위가 축소되는 것이다.
고현의 : 자연의 법칙 ‘인간이 생활하기 위해 자연에 가해지는 것, 예를 들어 돼지를 잡아먹는다든지 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응우 : 나는 자연을 음미함으로써 우리들의 생각(사고)이 자연에 삽입(투영)되어 작품이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을 사랑한다면 그냥 놓아두는 것이 진짜 사랑하는 것 아니냐?’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당혹스러웠다. 당연히 자연에 뛰어들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현희 : 이미 부여받았다. 예술인이기 때문에...
이응우 : 어디까지가 자연과 동행하는 것인가를 확실히 정할 수 없다. 나무를 해서 밥을 지어 먹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연에 대한 행위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보호라는 기본적 개념 때문에 제약을 받아온 것 같다. 자연을 음미하면서 작품을 해야 한다.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고현희 : 보편화시켜야 한다.
이동구 : 나무에 은분 칠을 한 것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일 수 있다. 오히려 나무는 당해보지 못한 일을 당함으로써 즐겁고 뿌듯해할지도 모른다.
고승현 : 그것은 논리다. 이제까지 자연보호의 문제를 생각하면서 작업한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이동구 : 이기방씨가 통나무 단면에 붉은 칠을 하려고 한 것을 고승현씨가 저지했던 것이 생각난다.
고승현 : 누군가에 의해서 이미 절단되었던 것에 대한 행위였기 때문에 꾸밈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야기하고 나서 나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느꼈고 그렇게 이야기한 것을 후회했다. 이 자리를 빌어 미안하게 생각하고 사과한다.
이동구 : 이제 서서히 야투의 성격이 뚜렷해져야 더욱 의욕적인 작업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고승현 : 어려울 것 같다.
고현희 : 설정할 수 있다. 모 장소에서 이루어진 야외현장전은 재미없고 역겨웠다. 그리고 애매모호했다. 하지만 ‘야투’는 자연을 사랑하는 입장으로 ‘야투’의 성격은 정해질 수 있다.
이동구 : 그렇다! 설정될 수 있다. 이제 단순히 자연에서 행한다는 것과 자연과 동행하는 것과는 구별이 가능한 것 같다.
이응우 : 단순히 발표를 위한 현장이 아니라 ‘야투’는 자연을 내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고승현 : 자연 속에서 자연스러웠던 아이들과 도시에서 살던 아이들이 자연(강변)을 접했을 때 어색함은 비교가 된다. 모 현장전은 후자와 같은 것이었고 억지논리를 펴기 위한 꾸밈이었고 피곤했다. 왜 도시공간을 떠나야 하는가? 우리에게는 오염된 공간을 떠나려고 하는 심성이 있다. 도시공간에서는 – 인위적인 물질 속에서는 – 자연스러운 심성을 찾을 수가 없다. 우리 ‘야투’를 “자 연 미 술”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나는 자연을 부정해 본 적이 없다. 흐르는 물과 부는 바람을 그대로 받아들여 왔다. 부정하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자연과 우리는 깊숙이 만나야 한다. 그것의 판단은 쉽게 온다.
이동구 : 자유로워야 하는데, ‘모’씨의 장소에 대한 생각은 환경예술적 입장이었다. 인위적 환경 속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의 작품을 보고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스스로의 관념에 의해 간간이 제약받기 때문에 축소되어지는 것 같다.
이기방 : 어려울 것 같다.
고승현 : 자연 앞에 왜소하다는 것을 느낀다. 자연은 분석할 수 없다. 순응하는 가운데 찾아지는 것은 무한하다. 버뮬러교수※의 칭찬은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교만해질 소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신남철 : 나는 추함 때문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행위가 가해질 때 비로소 예술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술의 속성(본질)은 자연에 있다고 본다. 자연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어떤 형식을 통해 나타낼 때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나는 아름다움을 자연에서 찾고 싶다. 이름다움이 존재하는 것은 확실하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응우 : 미적인 요소를 자연에서 찾아보려는 것이냐?
신남철 : 그렇다!
허 강 : 그냥 지나쳐 흘려버릴 수 있는 것을 찾아서 보여주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누군가에게 “야투에 관한 질문에 대하여 확실히 대답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회피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분 좋지 않았다.
고승현 : 대답하고 싶지 않은 사람, 아직 설명되지 않는 사람, 대답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어떤 논리적 근거를 가지지 않고 뛰어든 사람도 좋은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중요하다.
이기방 : 나는 군대를 제대하고 처음 참가했을 때 자연하고 놀려고 했다. 그리고 노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방법이 문제다. 문제는 방법이다. 방법을 생각하다 보니 논리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방법을 취한 이유, 작품의 뒤에 논리가 있어서는 안된다. 노는 것이니까. 누가 나의 작품에 대해 물어오면 논리적 체계를 가지고 설명하려 한다. 나는 간사해서 이러쿵저러쿵 세세하게 대답하려 한다. 이번에는 이런 혼돈 때문에 작품을 할 수 없다.
이동구 : 지적인 긴장 상태에서 떠난 진실성이 필요하다. 논리는 뒤에 생각되는 것이다. 작품에 굳이 해설을 덧붙일 필요는 없다.
이기방 :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태도라면 나로서는 작품을 하기가 쉽다. 나는 자연에서 미술을 하면서 놀고 싶다. 여기서 미술은 미적 표출이다.
고승현 : 놀고 싶다는 말이 좋다. 진실, 순리가 되어야 한다. 진실을 논리로 풀어볼 수 없다. ‘미술이다. 아니다.’는 참여하는 사람의 입장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기방 : 존재 이유를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비판할 수 있는 상태에서 작품을 하고 싶다.
이동구 : 논리에 압박받을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연연해하면, 깊이 파고들면 그것이 자신을 구속하게 된다.
이응우 : 작업하는 순간 느낌이 있다. 자기만 간직할 수 있는 진실성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같이 참여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전원길 : 어디까지가 자연과 동행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는 각자에게 달려있다. 자기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자연이 존재하는 것처럼...... 나는 ‘야투’를 ‘손으로 자연을 살짝 만진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나는 내 나름의 논리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행위를 한다. 논리가 먼저다. 좋은 것을 자랑하고 싶은 심정으로 작품을 한다.
고승현 : 탐구한다는 태도로 작품을 해야 한다. 겸허한 가운데 노력해야 한다. 나와 자연과의 관계가 무의미하다고 느끼면 떠나야 한다.
여러분의 의견에 감사한다. 이상 토론을 마치겠습니다.
계룡산과 금강이 잘 어우러져 경관이 아름다운 곳, 평사낙안의 길지에서 그날 밤 ‘자연미술’은 이 세상에 처음 얼굴을 내민 것이다. 금강을 젖줄로 성장한 젊은 예술인들 10여 명의 작은 단체에서 시작된 파문이 40년이 지난 오늘, 지역의 한계를 넘어 지구촌 각지에서 자신들 주변의 자연과 환경을 벗으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다른 나라에서는 관련 학과가 개설되는 등 급물살을 타고 있으나 정작 우리나라에는 자연미술강좌 하나도 개설된 바가 없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투는 그 불씨를 살리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으며 산업사회와 자본주의가 망가트린 자연과 인간이 화해를 통해 평화로운 미래로 나아가는데 일조를 목표로 삼고 있는 한, 언젠가 미술사의 한 페이지로 남을 것을 기대해 본다.
※ 클라우스 뵈뮬러(Claus Bümuler) : 북부독일의 이론가. 1980년대 함부르크미술대학에서 자유미술학과교수로 재임 중 야투 회원인 임동식을 지도했으며 자신의 교실에서 사계절연구회 슬라이드 자료로 제자들과 함께 오픈스터디를 진행함. 초기 야투의 작업을 최초로 인정한 미술이론가.
(당시 대화형식으로 진행된 자유토론 회의록을 그대로 옮기며 읽기 편하도록 일부 정리하였다.)
고승현, 백색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