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왕산의 요정
"오늘은 매사 조심들하거라." 엊저녁 꿈자리가 뒤숭숭했다며, 등굣길의 자식들에게 이르곤 하셨던 엄마의 말씀이 기억나는 날. 이 말을 들은 날은, 괜스레 마음이 무겁고 조심 또 조심을 했던 기억이 생생한데, 오늘 아침이 꼭 그런 날이었다. 꿈이지만, 시동생과 조카들이 왜 그렇게 나를 힘들게 했는지, 깨어나서도 그 여운이 길게 남아 영 찝찝한 아침이었다.
아, 발왕산. 평창에 가기로 한 날인데, 어쩐지 꿈 때문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갈등하게 되었다. 눈이 많아서 미끄럽다고 했는데, 춥고, 케이블카도 오래 타야 한다던데 라는 생각 때문에 자꾸만 갈팡질팡하게 하는 날이 될 줄이야......
그런데, 블라인드를 걷으며 나타난 햇빛 한줄기 때문에 마음을 확 바꾸게 되었다.
Ou, beautiful sunshine!
찝찝함도 잠시, 윗집 동생과 10시에 만난 우리는 재잘재잘. 오늘 처음 만난 반가운 사람처럼 수다를 떨다 보니 올림픽 개최지, 그새 평창에 도착했다. 같은 강원도인데도 도로만 빼고는 눈 덮인 새하얀 풍경이 먼저 반긴다. 용평스키장이란다. 평일 오전인데도 스키를 타려는 젊은이들로 케이블카 앞에 늘어선 줄이 꽤 길다. 덜커덩덜커덩 외줄에 매달린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데, 꿈 때문일까? 갑자기 공포가 몰려온다. 괜찮은 걸까? 발아래 쌩하고 미끄러지는 스키 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숨을 크게 골라보지만, 20여분이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휴~, 까마득히 멀게 느껴졌던 1458m의 정상에 다다라서야 정신을 차린다. 그런데 이 번엔 매서운 바람이 분다. 볼을 때리는 바람을 견디며 간신히 아이젠을 착용하고 등산을 시작한다. 휴~~, 이제야 좀 안심이 된다. 나뭇가지에 눈꽃이 피어나고, 수정 같은 얼음꽃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만난 작은 눈사람. 앙증맞은 크기의 눈사람이 발길을 멈추게한다. O, my God! 설국 공주가 만들어 놓은 발랄한 이 요정 때문에 뒤숭숭하던 꿈 생각이 확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발아래 펼쳐진 산자락들이 다투어 절을 하는 모습을 제대로 감상하며, 참 잘 왔다고 생각한다.


파란 하늘과 흰 눈의 절경아래 '천년주목숲길'을 따라 걷는데 믿기지 않을 만큼의 아름드리 주목들이 쭉쭉 뻗어있다. 수종을 달리 한 두 나무가 나란히 있다는 '어깨동무'나무, 마음을 비워야 장수한다는 몸통이 텅 비어 있는 '참선의 주목', 텅 비어 있는 몸통 속에 쏙 들어갈 수 있는 '고해의 주목'과 주목이 마가목을 품고 있는 '어머니의 품' 등, 수령이 천년이 넘었다는 주목에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스토리를 참 잘도 만들었다.


지그재그, 꼭 스키를 타듯 데크길을 걷고 또 걸어서 오르는 길목에서 '생명의 물, 발왕수를 만났다. 지혜, 장수, 사랑의 샘이란 이름이 붙은 물 중에 난 사랑의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셔보았다. 달콤한 맛, 역시 사랑의 맛이다.

서울대학교의 교표를 꼭 닮은 나무가 '서울대 나무'라기에 손주가 서울의 대학교에 가기를 소망하며 기꺼이 찾아가 보았다.
"다민아, 씩씩하고 건강하게 자라다오."
"지혜로운 사람이 되거라."
휴~~~, 눈길 산행도 아이젠과 스틱 덕분에 무사히 마쳤다. 모자와 장갑, 두툼한 점퍼 덕분에 춥지 않았으니 참 다행이다. 옥이 덕분에 올 겨울 추억 하나를 또 쌓게 되었다. 감사한 하루, 그러고 보니 내일이 벌써 2월이다. 5시면 퇴근하던 해님이 오늘은 어쩐 일로 미적미적. 낮이 길어졌다며, 퇴근할 생각이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