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식지로서의 자연, 자연과 인간의 해방(이응우)
이응우 “꽃 아래서 명상” 영국 다팅턴 2018
메마른 담벼락 벽돌 틈에 서식한 한 떨기 꽃! 꽃이 아니었어도 아름다울 법 한 자리건만 하물며 아름다운 꽃이랴!

이응우 “녹색 머리칼의 여인” 영국 Dart-River 2018
유난히 맑은 시내 녹색 수초가 물살의 간지럼을 탔나 바람에 나부끼는 여인의 머릿결처럼 하늘거린다.

이응우 자연미술전
Ri Eungwoo Jayeonmisul Exhibition
서식지로서의 자연, 자연과 인간의 해방
욕망의 대가
이응우 “위기에 처한 돌” 한국 공주 금강 2011
백척간두를 연상하듯 작은 막대 끝에 돌이 위태롭게 올려졌다. 많은 생명이 떠난 강 저쪽 콘크리트 건물들이 들어섰다. 정작 위기에 선 주인공은 누구인가?

지구는 태고로부터 장구한 역사를 통해 생명의 서식이 가능한 땅으로 변화를 거듭하였다. 인류의 조상은 약 200만 년 전 지구에 등장한 이래 빠른 인지의 발달과 다양한 도구의 활용을 통해 일찍이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수 세기 동안 인류가 도달한 과학기술 혁명은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바꾸었으나 우리의 터전인 자연계에 가공할 영향을 끼쳐 전 인류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 이념이 지배하는 산업사회의 구조적 문제는 오랜 반성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커녕 날이 갈수록 깊어 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고의 획기적 전환과 새로운 방법을 통해 인류가 직면한 지구환경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역사적 대전환을 이루어야 한다.
이응우 “우르미아호수의 아홉 개의 돌” 이란 타브리즈 2016
이란 북부 아제르바이잔 국경지대에 타브리즈라는 도시가 있고 그 남서부에 우르미아(Urmia) 호수가 있다. 기후변화로 몸살을 앓고 있어 특히 건기에는 바닥이 드러나고 서걱거리는 소금사막이 된다. 물이 달아난 호수는 사람이 없는 유령도시처럼 공허했다. 호수에 물이 가득하여 배가 드나들고 주변 사람들이 활기찬 모습을 되찾길 기원한다.

반환점
이응우 “우리는 날 수 있을까?” 리투아니아 북부 라구나 2017
리투아니아 북부 거대한 사구 호수에는 작은 조개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옛날 우리의 강에도 이런 조개들이 수없이 서식했었다. 하굣길 멱감고 한 바가지 잡아 집으로 돌아가면 어머니께서 “강은 위험해!”라고 말씀하시고 된장을 풀어 구수하게 끓여 주셨다. 다시 그런 날이 올까요?

마라톤은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뛴 정신을 기리며 올림픽의 대표적 경기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경기방식은 구간이동이 아닌 제자리로 돌아오는 방식이다. 그래서 반환점이 생긴 것이다. 인류의 문명은 어떠한가? 과연 반환점이 있을까?
르네상스 이후 수 세기 동안 이룩한 미술의 역사는 당대의 인문학적 성과와 함께 인간이 자연을 극복하는 과정이었다. 20세기에 이르러 미술은 처음 자연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점차 자연과 무관한 채 우리들의 상상 속에서 얼마든지 뻗어나갈 수 있도록 진전되었다. 이것은 그 이후 미술의 비약적 발전을 견인하였으나 예술 속 인위의 범람은 자연의 한 부분인 인간의 정서를 위협하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현대인의 삶이 자연과 유리된 것과 다르지 않다. 첨단의 과학 문명이 늘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진 않는다. 우리는 오늘날 그 안에서 야기되는 각종 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
1981년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함성과 이를 막으려는 부도덕한 정권의 충돌로 인해 세상이 온통 난리 속일 때 일부의 젊은 예술인들이 미술을 들고 자연으로 들어갔다. 그 후 40여 년을 익명의 자연과 만나며 그들만의 새로운 방법(자연미술)을 창안하였다. 이른바 친자연적 태도, 자연과의 동행 등 자연의 질서를 존중하고 그 아름다움을 여과 없이 활용함으로써 자연이 표현의 수단이 아니라 표현의 목적이 된 것이다. 즉 표현의 주체인 예술가와 대상인 자연이 손을 맞잡은 형국이다. 그들이 즐겨하는 작업은 원시반본(原始反本)으로 비견될 만큼 오늘날 인류가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이룩해 놓은 동시대 미술과 전혀 다른 각을 갖고 있다.
이응우 “만다라와 함께한 명상” 영국 다팅턴 냇가 2018
냇가의 매끄럽고 크기가 다양한 돌을 만지작거리는 즐거움은 상상의 물꼬를 터준다. 크기에 따라 둥그렇게 동심원을 만들다 보니 우주의 기운이 응집된다는 만다라처럼 보였다. 아침 그늘에 가만히 앉아 명상에 잠기는 것은 나만의 호사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