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야, 나 좀 도와줘""알았어. 내려갈게"남편이 도와주겠다고 해서 호미와 씨앗을 들고 밭으로 갔다. 남편이 올 때까지 우선 풀부터 뽑고 무씨를 뿌릴 자리를 준비했다. 무는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열무를 만들어 김치를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오늘도 풀부터 눈에 보인다. 비만 오면 온갖 풀씨가 무더기로 뿌려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번 비에도 예외 없이 좁쌀만 한 싹들이 밭 한가득 나왔다. 아무래도 비가 풀씨를 뿌리는 것만 같다. 이럴 땐 호미보다 넓은 면적을 긁어내는 도구가 더 유용하다. 풀도 뽑고, 고랑의 풀도 긁어내주고, 무씨 뿌릴 곳에 돌멩이도 골라주는 작업을 마쳤는데도 기다리는 남편이 오지 않았다. "자기야!" 동네가 떠나가도록 외치며 남편을 찾았더니, 주차장에서 자동차를 손보고 있었다. 얼..
"비 와?""오네"일기예보가 틀린 건지, 새벽에 그친다는 비가 아침에도 내리고 있다. 하루 종일, 그리고 밤새 내리는 비 때문에 어젠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오전에 은색을 품은 베이지색 조끼를 완성했을 뿐. 하루 종일 소파 붙박이로 있자니, 손발이 심심하고 온몸이 근질근질하다. 이런 날은 우리 부부가 싫어하는 날. 힘든 날이다.내리던 비가 주춤한 틈을 타,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갔다. 키가 큰 꽃들이 저리도 겸손해지다니, 모두 허리가 휘어져 땅에 코를 박고 있으니, 지지대를 세우고 끈으로 묶어 넘어진 꽃들을 일으켜 세워줬다.비 때문에 결석을 한 밭에 내려갔다. 날마다 오던 밭에 하룻만이다. 그런데 밭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배추도 시금치도 부쩍 자랐고, 처음 보는 쪽파가 손바닥만 한 크기로 자..
덥다고 너무 덥다고저리 가라고 밀어 보내지 않아도머물고 떠날 때를알고 있는 여름은 이미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잠깐 머물다 금새 떠날 것을 알면서도호들갑을 떨며 아우성을 치던 우리는언제 그랬냐고 정색을 하며 가을을 반기겠지짧디 짧을 가을 정취를 느끼기도 전에 그림자처럼 사라질 것을 모르지도 않으면서 마치 가을이 영원히 있어줄 것처럼 칭찬 하다가언제 떠났는지도 모르고 어느샌가입김 호호 불면서 또다시 추위를 나무라며 문지방 너머 목 길게 빼고 봄이 오기를 마냥 기다릴 거다.그러면서 나이만 먹는다고세월이 너무 빠르다고 투덜거려도 보고 용기없어 하지 못했던 것에 미련도 되씹어 보며커다란 나이테 하나를또 끙끙 둘러 메고 앉아문밖 건너 진달래 붉은 향기 가슴에 밀려들면 혹 서러워눈물 흘릴지도 모르겠다...
덜커덕.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잠이 깼다. 일찍 일어난 남편이 벌써 밖에 나갔다 들어왔다. "비 와?" 물으니 "응. 비 와" 하는데, 우왕 잘됐다. 오늘도 밭에 물을 주지 않아도 된다. 고마운 비. 시간도 벌었고, 에너지도 벌었으니 일석이조다. 열 번 수돗물 보다 한 번 비가 밭엔 피가 되고 살이 된다고 이웃이 그랬다. 비에 포함된 다양한 성분이 에너지라고 했다. 그게 엄마품 같은 자연의 힘이기도 하고.비 그친 뒤, 밭에 내려갔다. 어제 없던 당근과 시금치가 싹을 틔었다. 여리디 여린 연둣빛 당근 싹과 시금치 싹이 세상에 나왔다. 다 비 덕분이다.제일 먼저 싹이 나온 총각무. 역시 형님답게 제법 무 이파리 모양을 갖추었다.그런가 하면 엊그제 발아한 무의 싹도 제법 자랐다.올봄, 두 그루 심은 아욱. 처..
"자기야, 아침 일찍 먹자. 나 밭에 가야해" 남편을 채근해서 어제보다 일찍 식사를 했다. 오늘은 쪽파를 심어야 하겠기에 남편 출근은 뒷전이고, 밭이 먼저다. 해뜨기 전에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AI가 가르쳐준 대로 쪽파의 윗동을 가위로 잘라주었다. 그렇게 다듬은 쪽파를 심기 위해 작은 고랑 두 줄을 만들었고, 소꿉장난하듯 흙을 덮고 물을 뿌려주었다.한 바구니를 심었는데, 밭에 여유가 있다. 한 바구니 더 사 올걸 잠시 후회를 했다. 김장을 위해 이것저것 뿌리고 심었더니, 밭은 제법 그럴듯하다. 파릇파릇 올라온 총각무와 적갓, 뾰족뾰족한 대파 jone과 마치 초록꽃처럼 보이는 배추밭의 조화라니.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딱 좋은 size다. 내 놀이터가 재미있는 이유다."언니, 우린 배추 두 번 심었..
"언니, 저 사람 하루 종일 일해"청양고추를 나눔 하러 동생집에 갔더니 제부는 오늘도 두 팔을 걷어붙이고 일을 하고 있다. "그러게. 형부도 그래. 식음을 전폐하고 일해" 하면서 두 자매가 서로 부지런한 남편 자랑이다. 나도 아침에 대파를 심었다. 파를 유난히 좋아하는 동생이 대파 모종을 나눔 해준 덕분이다. 밭에 내려갔으니 심은지 5일 된 배추와 당근, 싹이 튼 총각무와 무에게도 물을 흠뻑 뿌려줬다. 해 뜨기 전에 일을 마무리 했다. 오전 밭일을 마무리하고 코바늘을 잡고 있을 때, 옥이가 출근한 남편 몫까지 챙겨 김밥을 말아왔다. 옥이가 해준 맛있고 정성스러운 김밥을 먹고, 오후엔 부엌에서 열일을 했다.두 그루 심은 청양고추를 모두 땄다. 더러는 붉고 더러는 청고추였다. 청양고추와 잘 익은 붉은 고추,..
아침 7시. 아직 해가 뜨지 않았으니, 1시간만 일하자 하고 밭으로 갔다. 배추와 어제 심은 양배추에 물을 주고, 오늘의 목표 시금치 씨를 뿌렸다. 미리 뿌려준 퇴비와 유박비료를 잘 섞어주고 돌멩이도 골라주니, 부드러운 흙이 되었다. 씨를 아끼기 위해 적당히 흩어 뿌리기를 하고 고운 흙을 덮어줬다. 오늘의 목표 달성. 그러나 뭔가 아쉬웠으니, 밭 가장자리의 풀을 뽑았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시금치 씨를 뿌리는 작업은 섬섬옥수로 차분하게 진행을 했는데, 풀 뽑기는 시원시원. 아니, 감정 실은 모양새다. 팍팍 호미질에, 쑥쑥 뿌리째 뽑아대니 모기가 물어뜯어도 알아채지 못했다. 내려온지 꽤 시간이 흘렀을텐데 해가 뜨지 않으니, keep going. 이 번 작업장은 고추밭이다. 붉은 고추만 골라 땄다. 작..
어제도 성당엘 두 번이나 갔다. 새벽미사엔 제대에 올라가 독서를 낭독했고, 그리고 교중미사에선 카페에 올릴 사진을 찍었다. 교중미사 때, 신부님 영명축일과 은퇴미사 행사가 있었기 때문이다.'77년 세례를 받고 드문 드문 성당엘 다녔었다. 결혼과 함께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시부모님 따라 빠지지 않고 주일미사를 드릴 때에도 반강제적 신앙이었다. 그러다가 청구성당에서 만난 신부님의 강론이 좋아 주일을 거르지 않고 성당엘 다녔었다. 그리고 그 신부님이 아버님 장례미사를 집전해주셨는데, 일부러 시간을 내주신 신부님이 감사해서 미사 외에 신부님과 독대를 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렇게 신부님의 존재는 제대 위에 계신 높으신 분이셨다. 신부님은 내게, 멀고 먼 나라의 지존하신 존재였었다.강원도에 내려와 찾은 성당은 신축..
누구나 다 그럴까? 난 좋아하는 일을 할 때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 일을 끊기도 어렵다. 좋아하는 손뜨개가 그렇고, 좋아하지 않아도 풀 뽑는 일이 그렇다.흰색 니트에 이어 녹색 니트를 떴고, 연달아 베이지색 펄 니트를 시작했다. 샘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떴다 풀었다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뒤판 한 번. 소매는 같은 실수를 서너 번이나 했으니, 완성까지 최장 시간을 기록했다. 소매 때문이었다. 흰색 니트의 가장 단점이 소매와 어깨를 연결하는 곳이었는데, 그걸 보완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으니......암튼 베이지색 니트도 시간이 완성해 줬다. 속도보다 결과가 더 중요하니, 시간의 양은 내게 그리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어제저녁에서야 완성한 니트. 여전히 소매선이 1% 부족하지만, 앙증맞은 neck l..
밭에서 딴 사과를 깎았다. 마트에서 산 사과보다 더 맛있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런데 깎여진 사과껍질을 쓰레기통에 버리려다 그만 손가락을 베였다. 순간의 일이었고 기분 나쁜 감촉에 이어 약지 손가락에서 피가 났다. 얼마 전 감자 껍질에 손을 베이고 두 번째다. 1cm 정도 베인 상처가 일상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컸다. 상처에 물이 닿으면 불편하고, 아파서 고무장갑을 착용하면 답답하고, 그렇다고 부엌일과 밭일을 멈출 수가 없으니, 한 손으로 일상생활을 하는 게 참으로 불편하기 짝이 없다. 하필 손 베인 날이 모종을 산 날이다. 베인 손가락에 소독약을 바르고 일회용 반창고를 붙이고 장갑을 끼고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었다. 호미질을 할 때마다 다친 곳이 욱신욱신. 힘을 주거나 장갑이 스칠 때마다 여간 불..
"가자. 오후에 비 온단다" 하고 동생을 재촉해서 모종가게에 갔다. 무씨와 당근씨를 사고, 배추 모종 한 판과 양상추, 상추 등을 사 왔다. 어제에 이어 당근씨를 뿌리고, 무씨를 뿌렸다. 뿌리채소라서 땅을 깊이 파서 돌과 뭉친 흙을 골라주고 씨를 뿌렸다. 씨를 뿌리자마자 비 한 줌이 내렸다. 해마다 8월 15일 광복절에 배추 모종을 심었는데 작년엔 배추가 타는 일이 발생했다. 무더위 때문이었으니, 그 기억 때문에 올핸 8월 하순에 심으려다 내일 온다는 비 때문에 오늘 심었다. 70 포기를 사려고 값을 물으니 7 포기 1,000원이란다. 140 포기 한 판이 14,000원 이래서 덜컥 한 판을 샀다. 동생과 나누면 되고, 작년 같은 일이 또 생길 수 있으니 넉넉히 심은 게다.동생은 오늘에서야 두둑을 만..
오늘 할 일은, 지난 비로 가지가 땅으로 축 늘어진 수국과 황금조팝을 전지 하는 일이었다. 어제저녁 잠들기 전에 계획한 일이었는데 그만 늦잠을 잤다. 아침 8시. 햇살은 이미 오후처럼 강렬하다. 오랜만에 코바늘을 잡고 완성되어 가는 간절기 니트를 떠나갔다. 그런데 고맙게도 구름이 나타나줬으니 밭으로 직행을 했다. 호박과 참외를 딸까 했는데, 통통하게 살이 오른 고구마순이 눈에 띄었다. 툭툭 가지를 꺽어 모으니 순식간에 한 줌이 넘는다. 오늘 저녁 식탁엔 고구마순 볶음을 올릴 수 있겠다. 그 다음엔 사과. 빨갛게 익어가는 부사인줄 알았던 사과는 홍로인 것 같다. 벌레 먹은 것과 못생긴 낙과를 주워 깎아 먹어보니 아니 이건 진정 사과맛. 사과가 사과맛인 게 신기할 뿐이었다. 오늘 날씨는 구름과 해가 아이들..
그 좋아하는 뜨개를 하다가 슬그머니 밭이 생각났다. 노란색을 띠기 시작한 참외는 얼마나 더 익었는지, 엊그제 손톱만 했던 수세미는 또 얼마나 자랐는지 궁금해졌다. 밭에 내려가는 도중에 풀을 뽑는 나쁜 습관이 생각나, 오늘은 내려가기 전에 완전 무장을 했다. 모자, 장갑, 긴팔, 긴바지, 양말과 장화를 장착했는데 그러길 잘했다. 역시나 난 풀부터 한 판 뽑고 나서야 순시를 했으니......밭 한 바퀴 돌고 났을 때, 오늘의 목표가 생겼다. 일기예보엔 오후엔 비가 온다고 했으니 총각무와 붉은 갓 씨를 뿌리기로 했다. 남편이 퇴비를 뿌리고, 씨 뿌리기에 적당한 기초를 만들어줬다. 남편의 도움으로 일이 한결 쉬어졌다. 호미로 씨 뿌릴 자리를 얕게 파 주고 서쪽엔 총각무 씨를, 남쪽엔 갓 씨를 뿌려줬다. 각각 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