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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빼뚤 글쓰기

채소 백화점

요술공주 셀리 2024. 6. 23. 14:31

가랑비에 옷 젖는다더니, 여름비에 꽃과 채소들이 죄 넘어졌다. 비가 많이 왔다. 키가 큰 우단동자가 땅 위에 엎어져 있는 것을 끈으로 묶어 일으켜 세워줬다. 고추와 토마토, 오이도 집게로 고정시키고 지지대에 바짝 묶어주었다.

물기를 흠뻑 들이킨 땅이 보드랍다. 풀을 뽑기에 최적인 환경. 그냥 지나칠 수가 없지. 맨손으로 풀을 뽑았더니 손가락 끝이 거칠거칠. 그래도 멈출 수가 없다. 내버려 두면 장마에 풀만 무성한 정글이 될게 뻔한 일이다.

하늘엔 구름이 오르락내리락, 구름을 비집고 나온 햇살이 오늘은 반갑다. 비로 씻은 초록의 얼굴도 윤기가 흐른다. 언제 또 비가 올지 모르니 밭에 나가 어제 밑작업을 한 배추를 뽑는다. 뽑을 때마다 후다닥 뛰쳐나오는 까만 벌레들. 벼룩이 만한 검정 벌레들이 얼굴을 덮친다. 으이그 징그러워라. 어젠 물컹하고 개구리가 만져지더니, 오늘은 또 지렁이를 만졌다.

캐낸 배추는 여러 포기인데 코딱지만 한 것부터 게딱지만 한 것까지 참 다양하다. 모두 합쳐야 실한 배추 1~2 포기의 양이 될까 말까? 오이는 제법 모양새를 갖췄으나 역시 1% 아쉬운 크기. 고추는 더 클 수 있겠으나, 매운 걸 못 먹으니 일부러 작은 것으로 땄다.



올여름, 첫 수확이다. 그런데, 이걸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다. 배추는 벌레가 지나간 자리마다 구멍이 숭숭 뚫려있고 무는 뿌리보다 꽃이 더 무성했으니 칼로 베기 무색할 만큼 엄청 딱딱하다. 고구마만 한 크기의 무, 그나마 제대로 된 것은 딸랑 한 개. 이걸로 과연 무얼 할 수 있을까?

 
 

 
 

 


내 밭에서 내 손으로 키운 아이들이다. 버릴 수는 없는 일. 파를 뽑고 부추를 뜯어왔다. 엊그제 캔 감자는 내일 아침에 쪄 먹기로 한다. 파와 부추, 고추와 오이도 있겠다, 내일은 배추와 무로 김치를 담가야겠다. 아들이 좋아하는 양상추는 상추와 쑥갓을 넣고 샐러드를 하면 되겠네. 아, 깻잎도 있구나. 오늘 더 따서 양념간장을 얹어 쪄 내면 맛있겠지? 부추는 양이 많으니 풋고추 송송 썰어 넣고 오늘 저녁에 부추전을 해 먹으면 좋겠다. 못생기면 어떻고, 1% 부족하면 또 어떤가. 애정 뿜뿜 담아 마음을 열었더니, 수확의 큰 기쁨이 가득가득. 내 밭이 채소 백화점일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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