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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빼뚤 글쓰기

휴식

요술공주 셀리 2025. 3. 4. 11:21

고삐가 풀린 망아지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고삐 풀렸으니, 천지가 갈 곳이지만 어디를, 어떻게 찾아가야 할지 막막한 기분. 지금이 그렇다. 정신없이 바쁘게 보낸 지난 한 주, 그리고 손주와 보낸 1박 2일이 썰물처럼 휘익 지나갔다. 그리고 찾아온 고요보다 더 깊은 적막함. 자주 있는 일이나, 낯 설은 느낌. 이걸 어떡해야 할까?

찌푸린 하늘이 불안하더니, 예고 대로 또 눈이다. 처음엔 수줍은 소녀처럼 망설 망설 하다가 이젠 대놓고 펑펑 내리고 있다. 센터에 가신 부모님 집도 텅 비어 있고, 부산하던 손주 없는 이 집도 텅텅 비어 있다.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조차 없었더라면 다시 또 적막강산이었을 게다. 나무 타는 소리와 나무 타는 불꽃을 바라보며 불멍을 한다. 시각과 청각을 모두 열어 놓으니 시계 소리, 가습기와 냉장고 소리도 들린다. 어쩌다 비행기 소리 들리면 그 또한 반가워서 귀를 쫑긋 세운다. 어쩌다 창밖으로 눈길을 주면 "에잇, 꼴두 보기 싫은 눈발이 치렁치렁" 내리고 있다. 우산을 쓰고 부모님 집 청소하러 갔다가 눈을 쓸었지만, 꼴 보기 싫은 눈 위에 다시 쌓이는 꼴 두 보기 싫은 눈. 그렇게 눈이 퍼붓고 있다.

그림을 그리려고 새 캔버스를 꺼내왔다. 보라색 매발톱꽃을 다시 그리고 싶어서다. 그러나 손끝은 동생 전화번호를 누르고 일주일 만에 통화하는 만큼 길고 긴 시간을 통화했다. 동생도 나도 말이 고프고 정이 고팠으니 말이다. 자식들 이야기, 손주 이야기, 나무와 꽃. 강원도를 주제로 삼아하는 수다는 한 시간도 두 시간도 부족하기만 하다. 창 밖에 오는 눈보다 더 깊은 자매의 마음. 어쩌면 3월에 만날 수 있다 하니 턱 밑까지 온 봄만큼이나 또 설렘이다.

마을버스 지나가는 소리. 하루 두 번 운행하는 버스 소리다. 그러니 벌써 3시 15분. 10시부터 지금까지 밖의 풍경은 요지부동이다. 눈 오고, 또 오고...... 끊임없이 오는 눈은 바라볼수록 마치 정지된 시간처럼 잿빛 하늘에 딱 붙어 있다. 반복과 반복의 이어짐이 오히려 정지된 공간처럼 똑같은 설경일 뿐이다. 해님도 정지, 바람도 정지. 나도 오늘은 정지된 시간 속에 푹 젖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먹고 앉아 있기, 물 마시고 앉았다가 커피 마시고 다시 앉아 있기. 난로 앞에서 멍~ 멍~을 하고 있다.

본당 15년 사 정리하기. 주보 작성하기. 아들 걱정, 손주 걱정, 건강관리공단에 보낼 서류 작성하기, 새 아파트에 입주한 친구에게 축하 전화 하기 등. 아, 오늘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 그걸 오늘은 실천해야겠다.
그런데, 아이고, 그래도 꼭 한 가지 할 일이 있으니 더 쌓이면 내가 더 힘들어질 일. 저 꼴두 보기 싫은 눈을 치워야 하다니...... 의자에 붙어 있던 무거운 몸을 끌고 밖으로 나간다. 그런데 습기를 잔뜩 머금은 눈은 빗자루도 요지부동. 땅에 붙은 눈을 끌어내기가 버겁다. 눈, 너만 아니었으면 하루쯤 여유로움에 쏙 빠져 있을 뻔 했는데, 이리도 달콤한 휴식을 즐겨보려 했는데 에잇, 저 놈의 눈 때문에 좋다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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