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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 대상들이 처음부터 자연적 대상처럼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기술적 요소들로 시작해 각각의 요소들이 결합하고 서로 연결되어 전혀 새로운 기술적 대상을 만들어 낸다. 이 연결의 사이에는 단순히 기술과 기술의 더하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발전 과정도 포함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기술적 대상은 또한 다른 기관이나 인간과 연결되어 새로운 방식으로 작동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증기기관을 생각해 보자. 단순히 연료를 태워 발생하는 열을 동력으로 사용하는 것을 증기기관이라 부르지만 그것의 탄생에는 열역학 원칙이라는 과학 이론이 바탕이 되어 있다. 또한 에너지를 보전할 수 있는 장치, 즉 외부의 압력이나 간섭으로부터 에너지를 보호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 수 있는 볼트와 너트 같은 기술적 요소들의 발명이 필요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증기기관은 단지 모터를 움직이는 동력으로서의 의미만을 갖지 않는다. 증기기관은 근대화의 상징이며 세계대전과 제국주의, 그리고 현재의 기후 문제를 발생시킨 대상이다. 결국 인간은 특정한 기술적 요소들을 만들어 내는 부분에는 관여할 수 있으나 그 대상들이 무엇과 어떠한 관계를 맺는지, 마침내 하게 될 역할은 무엇인지를 한정 짓는 일을 할 수는 없다.
물론 시몽동이 기술적 대상들을 인간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과 기술적 대상들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고 싶어 했다. 여기에서 시몽동이 주목한 부분은 바로 기술적 대상들과 인간의 '관계'라는 요소다. 단지 주인과 노예, 사용자와 도구라는 일방적인 종속의 관계가 아니라 둑립적 존재로서의 기술적 대상의 작동 방식과 그 안에 축적된 기술적 요소들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필요하다는 의미로서 말이다.
인간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기술적 대상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AI 시대 이전의 우리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세탁기나 냉장고, 하물며 자동차의 작동 원리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사용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왔다(사실은 문제가 있었지만 개개인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AI는 다르다. 현재의 AI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인간의 이해를 벗어나 있으며 그것의 독자적인 작동 방식은 인간을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제 우리는 AI가 인간의 통제 아래에 있다거나 인간에 속한 도구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AI의 독립성을 받아들이고 그를 한 개체로서, 자연적 대상처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논리를 가진 대상으로서 바라보며 그 신비로운 부분들을 읽어 내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