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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길이 모두 막혔다. 인간의 길도 모두 막혔다. 사람과 나라는 이웃과 벗이 아니라 잠재적 보균자와 위험요인으로 인식된다. 가까이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거리를 두어야 할 존재이다. 물리적 거리 두기를 넘어 사회적 거리 두기를 강조하더니 이제 거리 두기는 사회적 행동의 표준이 되었다. 서로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 모두가 방콕을 하고 필요한 것은 주문과 배달로 해결한다. 아이들은 정말 배달이 생활이 되어서 우리가 배달의 민족인 줄 알게 되었다. 접촉과 동화와 나눔에 의해서 유지되던 사회는 고립과 가족주의와 선택적 보호로 겨우겨우 유지되고 있다. 플랫폼 사업은 풍요의 시대를 구가하고 있으나 골목과 시장은 아우성이다.
집 앞을 나와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도 자유롭지 않은 시대에 여행은 언감생심이다. 여행이야말로 싸돌아다님이고 접촉이며 자유이고 오픈이며 매개이지 않은가? 접촉이 매개와 전이로 이어지는 팬데믹 시대에는 고립과 분리가 최소한의 안전조치이고 미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욕망이라는 것은 억압될수록 오히려 간절해지는 법이어서 행동의 자유, 여행에 대한 바람은 더욱 강력해진다. 이미 우리는 해외여행 연인원 3000만 명 시대를 돌파한 나라이어서 사람들은 저마다 아름다운 해외여행 사진첩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고 그 기억을 잊지 못해 꿈속에서라도 머릿속의 ‘인생 사진’ 한 장씩을 꺼내고 싶은 것이다.
두렵기만 하던 코로나 사태가 어느 정도 통제 상태에 놓이게 되면서 사람들이 다시 길을 나서고 있다. 막힌 외국의 하늘길을 피해 제주도로, 전국의 명산으로 발길이 몰려들고, 바이러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소규모 캠핑장에 모여서 닫힌 사회의 갑갑함을 해소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중년층의 소일거리였던 등산은 지금은 청년층의 취미생활이 되고 있다. 등산객들이 정장처럼 모셨던 고급 아웃도어가 물러나고 레깅스가 전국의 산들을 정복하고 있다. 사람은 움직이는 동물이어서 이동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전염병의 시대에도 증명해 주고 있다.
여행이 곤란한 시대에는 머릿속 사진첩의 명장면을 하나씩 꺼내 추억여행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름다웠던 한 장면만으로도 당시의 환희가 되살아나리라. 잘못과 헛걸음으로 맛본 씁쓸함과 고생 끝의 험담이 이제는 단맛으로 되살아나 설핏설핏 헛웃음으로 꽃 피어나리라.. 다시 뱃길이 열리고 하늘길이 열리기 전까지는 여행 후일담을 가끔씩 끄집어내 곱씹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사실 여행은 떠나는 것이고 돌아보는 것이고 돌아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여행을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이 지긋지긋한 ‘닫힌 환경’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질병의 지배, 국가의 통제, 불안과 우울, 갇힌 일상의 부자유와 부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나고자 싶은 것이다. 지금과는 상황이 다르지만, 우리가 늘 꿈꾸어 온 여행의 본질도 일상의 탈피였고 일상으로의 복귀였다. 사업이든지 직장이든지 글 쓰는 일이든지 일의 중압감, 옥죄는 인간관계의 압박감, 우울과 질병으로부터의 탈출, 며칠이고 또는 몇 달이고 길 위에서의 삶을 통한 비움과 모종의 신령한 것으로의 채움, 그리고 삶으로의 복귀가 여행이다. 굳이 여행의 의미 따위를 생각해보지 않아도 좋다. 여행을 가면서까지 교과서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떠나고, 비우고, 기대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배우고, 다시 돌아와 자기 자리에 앉으면 그뿐이다.
히말라야는 나에게 어느 날 갑자기 스며들었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배신의 얼굴로 바뀌고, 이어 겪은 경제적인 위기는 평탄하고 순진한 삶을 내동댕이쳤다. 외로움과 쓸쓸함에 덮인 삶은 나를 산으로, 길로 이끌었으며 전국의 명산과 온갖 둘레길이 나의 산티아고 순례길이 되었다. 방학 때마다 십수 번의 히말라야 여행을 한 후배 교사가 쓴 책 <인생에 한 번은 히말라야를 걸어라>(신한범, 호밀밭)는 순식간에 나의 혼을 히말라야로 빨아들였다. 받자마자 밤을 새워 책을 다 읽었다. 저자처럼 히말라야 산속에서 혼자 통곡하며 울고 싶었다. 책의 사진 속에 빛나는 설산과 빙하와 호수는 나를 한순간에 설산파(雪山派)로 만들었다. 다음 날 즉시 여행사 히말라야 트레킹 단체여행을 예약했다. 방학 중 여행이 가능한 학교를 선택하기 위해서 전보내신서를 썼다. 그러는 동안 부지런히 히말라야 여행기들을 읽었다. 꿈은 날마다 부풀어 올랐다. 히말라야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네팔 사람들의 신앙 및 생활에 대한 인문지리적인 교양도 쌓아갔다. 일 년에 한 달씩 히말라야에서 도를 닦는 ‘히말라야의 현인’ 임현담 선생의 책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히말라야에 대한 신비감과 경외심은 신앙심처럼 날마다 깊어져 갔다. 그런데 위기가 닥쳤다. 말리는데도 비 오는 날 월악 단풍을 보러 갔다가 하산 중에 미끄러져서 어깨 인대가 끊어진 것이었다. 수능시험 학교 책임자라 바로 입원도 할 수 없어서 보름을 미루었다가 어깨 수술을 했다. 수술하기 전에 의사에게 물었다. 수술한 후에 히말라야에 갈 수 있냐고? 경과를 보자며 야릇한 미소를 짓던 의사는 수술이 끝나고 나서는 무리라고 도수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할 수 없이 여행사 예약을 취소했다. 그러나 용암처럼 한번 부풀어 올랐던 내 속의 히말라야 열병은 가라앉지 않았다. 마음을 바꿔 무작정 카트만두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단기필마. 도착 이후의 계획은 없었다. 다들 미쳤다고 했다. 오른팔은 올릴 수 없을 만큼 여전히 불편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성산(聖山), 나 홀로 하는 히말라야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와중에도 시 몇 편 써온다면 더 바랄 게 없다는 마음이 염치없이 따라왔다. 시작은 이렇게 창대하게 무모했으나 열망과 기대만큼은 하늘의 별 밭처럼 무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