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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으로 가는 길(전종호)

요술공주 셀리 2023. 5. 22. 15:17

  갑작스럽고 무모하게 시작한 히말라야 여행은 나에게 기묘하고 신비한 체험을 안겨주었다. 신령한 얼굴의 설산(雪山), 우리네 삶과는 너무나 달라서 비현실적이다 못해 초월적으로 보이는 산사람들의 삶의 모습, 몇십 년은 뒤로 물러나 기이한 곳에 와 있는 듯한 시공간적인 후퇴와 착시, 산과 산을 이어가며 길게 흘러가는 무심한 구름 길과, 때로는 폭포같이 때로는 넓은 여울 같이 흐르는 계곡과 물소리, 가슴에 한가득 바람을 받아 말처럼 달려가는 듯, 사자의 포효처럼 외치는 듯 펄럭이는 오방색 룽다와 타르초, 포카라 페와 호수 주변 카페에 앉아 하루 종일 멍 때리는 무위(無爲),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대낮의 한가의 시간들. 한때 교회 부흥회처럼 그렇게 히말라야에 취해 뜨거운 은혜로 부풀어 올라 한 해를 살았던 나는 겨울방학이 되자마자 다시 히말라야로 향했다. 1월에 돌아오고 다시 12월에 떠난 것이니 한 해에 두 번 가는 여행길이었다. 홀려도 단단히 홀린 것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히말라야에 가는 사람들은 등반하는 사람들과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로 나뉜다. 보통 6,000미터가 그 기준이지만, 트레킹이라고 산을 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히말라야 3대 트레킹 코스는 안나푸르나(ABC), 랑탕, 쿰부 히말라야(EBC)이다. 풍요의 여신이라 불리는 안나푸르나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고 가장 대중적인 코스로, 시간 여유가 있는 사람은 푼 힐 전망대 코스에 이어서 걷는다. 산악인들이 안나푸르나 등정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4130m)가 종점이다. ‘천상의 화원으로 불리는 랑탕은 네팔의 1호 국립공원으로 강진곰파가 목표이며, 체리고리(4984m)까지 오르는 사람들과, 내려오는 길에 힌두인들의 성지인 코사인쿤드(호수, 4380m)까지 다시 오르는 사이드 트레킹 코스가 있다. ‘세계의 지붕이라는 쿰부 히말라야(EBC)는 에베레스트산을 직접 조망할 수 있는 코스로서, 도중에 5,000m 이상인 패스를 3개나 넘어야 하는 가장 험하고 힘든 코스이다. 이 밖에도 안나푸르나나 마나슬로 등 높은 산들을 중심으로 해서 한 바퀴 도는 어라운드 코스가 여럿 있고, 최근에는 무스탕 지역도 개방되어 외국인들의 방문객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1월 안나푸르나에 이어 이번에는 랑탕 계곡으로 간다. 랑탕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카트만두에서 관문인 샤부로베시까지 가야 한다. 150km. 지프를 빌리면 7시간, 버스를 타면 89시간 걸린다. 비포장이기도 하지만 워낙 험해서 오래 걸린다. 오기 전에 지인이 가능하면 지프를 이용하고 길옆의 낭떠러지가 무서우니 버스를 타게 되면 왼쪽에 앉으라는 말이 생각났다. 버스를 탔다. 오른쪽 자리에 앉았다. 지프는 너무 비쌌고 버스 자리는 오른쪽 자리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택이 항상 가능한 건 아니다. 차는 작은데 사람들은 무시무시하게 많이 탔다. 자리, 통로는 이미 의미가 없었다. 사람만 타는 것도 아니었다. 곡식 자루들이 무수하게 올라왔고, 자리가 없는 사람들은 자루 위에 앉았다. 닭도 타고 양도 탔다. 심지어 버스 위에 염소를 태웠다. 버스는 그렇게 흔들흔들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그래도 불평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무심하게 잠을 자는 사람도 있었다. 체념인가? 달관인가? 중간중간 사람들이 내리고 또 탔다. 도중에 버스를 세우고 점심을 먹었다. 아무도 서두르는 사람들은 없었다. 도중에 산사태 난 길에서는 임시로 난 새길을 달렸다. 달린다기보다는 기어간다는 말이 맞을성싶다. 낭떠러지와 길은 너무 가까웠고, 길 위에서 죽음과 삶의 교차는 아주 친숙했다.

버스가 출발할 때 작은 돌에 쓰인 ‘Heavenly Path’라는 표지판을 보았다. 하늘 가는 길? 하늘나라 같은 길? 천국에 이르는 길? 천국 가는 길? 하늘? 천국? 많은 생각들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얼마 전에 어지러워 입원한 적이 있던 해븐리 병원도 생각났다. 천국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믿는 자들이 가는 천국인가? 지옥과 구별되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의 그 천국? 그럼 예수를 모르는 이 산골짝 사람들이 써놓은 저 천국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렇지만 나는 분명 천국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여행이 일상으로부터의 격리와 해방감을 위한 것이라면, 세상에서의 분주함과 괴로움에서 벗어나 무언가 어떤 해방감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천국이 어떤 특정한 공간이나 사후의 왕국은 아니라고 믿으며 살았다. 평생 무언가 대안을 찾아 헤맸다. 지배 질서에 복무하는 교육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에 이르는 교육이 있을까 그 길을 찾아 노력했다. 대안적 세상의 가능성에 대하여,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대안적 공동체와 마을에 대하여 고민하고 토론하며 살았다. 또한 교육운동의 대안적 방법을 모색했다. 천국이란 결국 대안적 세계가 아닌가? 그러다가, 그러면서 지친 마음의 안식을 위하여 여기까지, 멀리 세상의 끝까지 온 것이다. 아직도 소나무 아래 동자에게 스승이 어디 계신가 묻기 위하여 이 골짝에 스며든 것은 아니다. 샹그릴라를 찾아온 것은 더더욱 아니다. 천국이란 어떤 종교가 상정하는 공간이 아닌 어떤 상태, 즉 경쟁과 투쟁, 번민과 분노가 사라지고 마침내 이르게 되는 잠잠함과 고요의 상태가 아닐까? 그래서 열반은 적정(寂靜) 즉 고요함이라 하지 않았는가? 백척간두가 아니라, 수천 미터 벼랑길을 달리는 저 흔들리고 불편한 버스에서 한 치 흔들림 없이 지어 보이는 저 허름한 사람들의 무심(無心)과 평온에 천국이 있는 것은 아닐까? 수타니파타의 한 구절을 생각했다. “번뇌의 화살을 뽑아버려 집착이 없고 마음의 평안을 얻으면 모든 슬픔을 뛰어넘고 슬픔이 없는 사람이 되어 열반에 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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