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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탕은 히말라야산맥의 북쪽과 티베트와의 경계 사이에 위치한 장대한 계곡으로, 1971년 네팔 최초로 지정된 국립공원이다. 랑탕 트레일은 샤브루베시(1,460)에서 시작해 강진 곰파(3,870)를 돌아 샤브루베시로 원점 회귀하는 일주일 일정의 트레킹 코스다. 길을 걷는 동안 티베트, 타망 부족의 마을을 거치고, 고레따밸라(2,972)부터 랑탕 리룽(7,256)이 보이기 시작하며, 강진리(4,400)에 오르면 좀 더 가까이에서 랑탕 리룽과 랑탕 Ⅱ, 랑탕 빙하가 보인다. 바라볼 수는 있으나 감히 오를 수 없는 산들이다. 발을 디딜 수 있는 최고의 높이에서 폭풍급 바람이나 눈보라가 멈춘 사이 숨을 멈추고 오방색 타르초 너머로 잠깐 우러러본다. 강진 곰파에서 체르고리(4,984)나 랑시샤카르카(4,160)로 더 높이 또는 더 깊이 들어가는 길이 있고, 하산 길에 방향을 틀어 고사인쿤드(4,380)나 헬람부 트레일까지 가는 사이드 코스가 있다. 영국의 등반가 틸만 윌리엄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라고 극찬한 곳으로 1949년 영국 탐험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네팔 사람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땅이었다. 알프스와 히말라야를 합해 놓은 듯한 비경을 자랑하는 랑탕은 울창한 숲과 계곡, 그리고 설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계곡의 여울 언저리 좁은 공간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에 소수민족이 모여 살고 있다. ‘천상의 화원’을 보기 위해서 네팔의 국화 랄리구라스가 피는 봄날에 오르는 것이 가장 좋다지만, 방학을 이용해야 하는 나에게는 언감생심. 추운 겨울의 랑탕도 내게는 충분히 분에 넘치는 은혜다.
애초에 랑탕은 길이 없는 곳에 야크가 드나드는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여긴 티베트 스님이 뒤따라가 발견했다는 전설이 있다. ‘랑’은 야크를 뜻하는 네팔 말이고 ‘랑탕’은 ‘야크를 따라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사람이 근접하기 어려운 한갓진 길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나온 말이겠지만 야크와 스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갑자기 우리 절간의 심우도尋牛圖가 생각났다. 심우도는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그린 불교 선종의 10컷짜리 그림이다. 처음 선禪을 수행하게 된 동자가 본성에 비유되는 소를 찾기 위해 산중을 헤매다가 마침내 소를 발견하고 길들인 뒤에, 그 소를 타고 집에 돌아왔으나 다시 소에 대한 모든 것을 잊은 채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 원래 살던 속세로 나가 중생 구제에 나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십우도 또는 목우도라고도 하며, 그 10단계는 심우(尋牛, 소를 찾아 나서다), 견적(見跡,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다), 견우(見牛, 소를 찾다), 득우(得牛, 소를 얻다), 목우(牧牛, 소를 치다), 기우귀가(騎牛歸家, 소를 타고 집에 돌아오다), 망우존인(忘牛存人, 소에 대한 모든 것을 잊은 채 앉아 있다), 인우구망(人牛俱忘, 소와 사람 모두 공空이라는 깨달음으로 원상圓相으로 나타내다), 반본환원(返本還源,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깨달음을 산수풍경으로 나타내다), 입전수수(入廛垂手, 중생 제도를 위하여 지팡이를 짚고 속세로 나서다)이다. 노자가 물소를 타고 서역으로 갔다는 전설에 의하여 본래 도교에서 나온 팔우도(八牛圖)를 곽암선사가 두 마리를 추가하여 십우도(十牛圖)를 완성했다고 하는데 여러 개의 버전이 있다. 우리 불교는 대체로 곽암선사의 그림을 따르고 있으나 원불교나 기타 불교 유파의 심우도는 약간씩 다르다. 절에 가면 건물에 벽화로 그려진 심우도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종교나 교리를 떠나서 참나를 찾아가는 수행의 과정을 쉽게 이해하게 해 준다. 랑탕 계곡은 티베트와 이어지고 있고 주민들 대부분이 티베트 불교 신봉자이다 보니, 땅 이름이 불교의 이상과 의미를 반영하고 있지 않을까, 부처를 닮고 싶은 사람들의 순례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학문적으로 고증된 것이 아니라 나의 추론에 불과하다.
아무려나 나는 나의 소, 참나를 찾아 이 길을 오른다. 몸과 정신의 한계를 시험하며 힘들게 떼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생각에 무게를 얹고 또한 그 무게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며 길을 걷는다. 랑탕은 내리는 길이 거의 없이 2,500m 가까이 쉼 없이 고도를 높여가는 상승의 길이다. 협곡에 난 실핏줄같이 좁은 길을 따라 빽빽이 서 있는 어두운 우림 속을 통과해 고레따벨라 언덕에 서야 비로소 전망이 트이고 랑탕 리룽 설산의 이마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비좁고 어둡고 축축한 미로를 통과하여 마침내 우주의 자궁에 이르면 그곳에 곰파(사원)가 빛나게 서 있다. 어두운 우림 협곡을 지날 때 저기 야크를 쫓아가는 동자童子의 노래(게송)가 들리는 듯하다. “망망한 풀밭을 헤치며 쫓아 찾아가니, 물은 넓고 산은 멀어 길은 다시 깊구나. 힘이 다하고 정신이 피곤하여 찾을 곳이 없는데 다만 늦가을 단풍나무에 매미 소리만 들리네” 목동이 산속으로 들어가 소를 찾는데 소는 보이지 않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망망한 잡초뿐이다. 종일 산을 헤매고 다녔으나 물은 넓고 산은 멀기만 하다. 애욕愛慾과 아상我相에 사로잡혀 세상을 헤매는 우리네 중생의 실상을 노래하고 있다. 보리 달마가 원래는 티베트의 승려였다는 이설도 있다고 하나 티베트 불교와 선종이 얼마큼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마을 골목마다 서 있는 마니석 돌담과 마니차와 스투파를 지나 강진 곰파에 이르는 랑탕의 계곡은 여행자에게 비움과 겸손과 고행을 끝없이 요구한다. “가슴을 드러내고 맨발로 시장에 돌아와, 흙과 회를 바르니 뺨에 웃음이 가득하구나. 신선의 비결을 쓰지 않고도 곧 마른나무가 꽃이 피게 하는구나” 개인의 깨달음에 머물지 않고, 저 사는 세상에 나아가 위로 지혜를 탐구하고 아래로 세상의 의무를 다하여 중생을 구제하도록 거듭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관광이 나라의 빼어난 빛을 본다는 관국지광觀國之光에서 온 말이라면, 오르고 내리며 여여한 하늘과 신령한 설산의 빛을 뿜어내는 안나푸르나는 관광의 길이고, 랑탕은 몸을 숙이고 마음을 내려놓고 죽음을 들여다보며 온몸과 마음으로 기어올라 마침내 도달해야 하는 수행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