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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높으니 물도 깊고(전종호)

요술공주 셀리 2023. 5. 26. 16:09

오늘의 목표는 라마 호텔이다. 걷는 시간 8시간. 고도 1000m 높이기. 라마 호텔이라고 해서 호텔이 아니라 롯지 몇 채 있는 한적한 마을 이름이다. 안나푸르나를 걸을 때도 히말라야 호텔이라는 곳을 지났는데 그게 호텔이 아니라 마을 이름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마을을 벗어나 산에 들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산이 아니라 계곡이었다. 협곡이 날카롭게 뻗어 있었고, 이 좁은 계곡의 한쪽 끝에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 위로 이어지고 있었다. 계곡에는 석회질 성분 때문인지 희뿌연한 물이 흘렀다. 계곡이라기보다는 작은 강 같은 느낌이었다. 조금 더 오르자 산속에 임시도로가 나 있고 공사 흔적이 보였다. 국립공원에 웬 공사일까 해서 물으니 수력발전소를 건설하고 있다고 한다. 인도에 대한 경제 의존성이 너무 높다 보니 인도와 혹시 문제가 생기면 온 나라가 암흑에 빠질 정도로 전력난이 심각한 편이라 이해되는 측면도 없지 않았으나 이런 세상 끝 오지 절경에까지 건설 붐이라니, 씁쓸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산이 높아지면서 길이 각도를 높이며 올라갔다. 계곡은 점점 좁아졌고 물줄기는 점점 가늘어졌다. 대조적으로 물소리는 점점 커졌다. 커지는 정도가 아니라 물소리만 들렸다. 지금 세계는 물소리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눈은 앞만 볼 수 있고, 가시거리라는 게 있어 보는 것에 한계가 있지만, 참 신기하게도 귀는 얼굴 양옆에 붙어 있어도 전후좌우 천지사방의 모든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살았는데, 협곡과 울창한 숲뿐 세계는 온통 들리는 것으로만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소리를 통해서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해 주고 있다. 이 물은 설산의 꼭대기 빙하가 녹고, 녹은 물방울이 땅에 스미고, 스민 물이 나무와 풀과 꽃들을 먹이고 키우면서 여기까지 흘러왔을 것이다. 이 물이 여기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시간의 길이를 생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온 천지의 꽃밭과 저잣거리 인간들과 온 세상을 구경하고 왔을 구름이 비나 눈이 되어 왔거나, 억겁의 빙하가 녹아 물이 되어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큰소리를 치면서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산에는 골이 있고 골에는 물이 있다. 그래서 예부터 우리는 자연을 산수山水라고 불렀다. 산이 높아 물이 깊다고도 했다. 산은 고정이고 부동不動이요, 물은 가변이고 유동流動이다. 부동과 유동, 가변과 불변이 모여 자연을 이룬다. 상극相剋의 특성이 모여 각각 대립과 투쟁의 상태가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풍경이 되고, 자연이 되는 것이다. 물을 만나면 다툼이 고요가 된다. 서로 다른 것들이 어우러지는 것이 우주와 인간의 삶의 본질이다.

물은 그렇다 치고 그럼 이 물소리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새소리, 바람 소리, 야크 우는 소리, 아무리 깊은 산중이라도 엄마가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도 있을 텐데, 왜 산중에서 물소리만 크게 들려 내 가슴을 후려치고 있는가? 물소리의 파동과 내 가슴의 파동이 같은 주파수라 긴밀하고 자별하게 들리는 것인가? 파동 명상이 이런 것일까? 소리에 반응하여 몸에서 일어나는 파동 즉 가슴의 벅차오름을 느끼고 있다. 호수에 잔물결이 일 듯이 몸의 바깥에서 안으로, 중심에서 바깥으로 확장되는 파동을 느끼는 동시에 마음의 움직임을 살피며 편안함과 자유를 느낀다. 우렁찬 물소리에 귀가 반응하고 심장이 북처럼 울리면서 온몸의 전율을 확인하고, 확장되고 심화되면서 하늘을 날기도 하고 바닷속 심연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물소리가 징이나 목탁, 띵샤, 싱잉볼 같은 역할을 하며 내 심장과 영혼을 조용히 흔들고 울리고 있다. 삼매三昧의 세계가 이런 것일까?

그런 깊은 경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샤부로벳시에서 라마 호텔까지 온종일 걷는 동안 물소리는 계속 나를 따라왔다. 물소리를 따라 걸었다. 물소리의 발목을 찾아보려고 했다. 물소리의 말을 경청하려고 했다. 히말라야는 아직도 근엄한 얼굴을 보이지 않고 있지만, 물소리는 촐랑촐랑 따라왔다. 히말라야 호텔에서 밤새 흐르는 물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지난번 트레킹의 기억도 소환되었다. 쉴 겸 물가에 앉아 철학자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에서 몇 구절을 적어 놓았던 메모장을 꺼내 읽어본다. “물은 꿈이 크다. 가장 낮은 곳에는 드넓은 바다가 있다. 물은 언어 없이 흐르면서 자유의 진실을 가르친다.”, “물은 자면서도 쉬지 않고 흐른다. 흐른다는 것이 산다는 것이다. 물들은 급한 곳에서는 우렁차고 평평한 곳에서는 잠시 머물러 조용히 파문을 만든다.”, “물들의 사랑은 급하고 거침없고 뚫고 나간다.”, “물든 사랑의 역학을 가르친다.”, “뜻 없는 것들에게도 소리가 있고 소리가 마음을 편하게 한다.”고 했던 그는 휴대폰에 일기를 남기고 죽었다. 암 선고를 받고 죽기 1년 전부터 하루하루 몇 줄씩 남긴 그는 물과 물소리에 대해서도 몇 줄을 남겼다. 그의 말대로 그의 문은 닫혔고 그의 시끄러운 일상은 문 뒤로 물러났다.” 죽음을 앞두고 물소리를 들으며 느꼈을 그의 고뇌를 생각하며 글을 읽는 나도 마음이 툭툭 꺾였다.”

오래전 대학 시절 물소리를 따라 속리산 깊이 한없이 걸은 적이 있었다. 걸으며 속리산俗離山의 이름과 속뜻을 오랫동안 깊게 생각했다. 속세를 떠난다는 의미, 속세를 떠나고 싶다는 바람, 속세를 떠날 수 있는 방법 그런 것들을 오래오래 생각한 적이 있었다. 연애 때문이었는지, 당시 유신 말기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는지 지금은 그 이유조차 분명하지 않지만 어린 나이에 속리산의 물소리를 들으며 망상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그때 속리산에서라는 시도 썼었는데 그 시는 지금 어디에 있지? 끌끌. 그때 결국 나는 속세를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군대를 가기 위해 머리를 깎았다. 천안천수千眼千手를 가진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고 중생의 고통을 해결해 주신다는 데, 혹시 아는가? 물소리가 나의 관음觀音이 되어줄지. 세상은 태평했고, 나는 침묵 가운데 종일 물소리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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