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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따벨라(3020m). 눈발이 굵어지면서 설산의 모습도 다시 흐릿해지고 앞길에 걱정이 생겼다. 그래도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점심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 롯지라고 해야 두서너 개뿐. 문을 열고 한 집에 들어가니 난로도 피어있지 않고 을씨년스럽다. 겨울철이라 장사도 하는 둥 마는 둥이다. 모모(네팔식 만두)를 시켜 놓고, 배낭에서 우의와 바람막이를 꺼내고 배낭에 방수포를 씌우고 나니 막 피운 난로에서 열기가 피어나기 시작한다. 훈훈하다.
눈이 오는 것은 상서로운 일일 수도 있고, 앞길의 고행을 수반할 수도 있다. 좋은 일들이 한순간 한 손에 잡히면 그게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좋은 일이 있으면 궂은일도 있는 법. 이왕이면 근심보다는 먼저 기쁨을 즐기자고 마음을 정하자 눈발이 금방 다정해졌다. 올해 네팔에 와서 처음 맞는 눈이다. 내게는 첫눈인 것이다. 첫눈은 첫사랑의 기억처럼 항상 포근하고 아득한 느낌을 준다. 어릴 적 고향 집 장독대에 쌓이던 소복한 눈들이 생각난다. 탱자나무 울타리 앞 눈밭에 친 그물에 걸려 아등바등하던 참새들, 그 흰색과 검은색의 묘한 대비의 뒤꼍과 함께. 눈이 오면 왜 그때 아이들은 강아지들을 몰고 다니며 동네 골목골목 소리치고 뛰어다녔는지 모르겠다. 고등학교 때는 눈이 많이 오는 날 뒷동산에 토끼몰이하던 일도 있었다. 서생들이 나가서 무슨 토끼를 잡을 수 있었겠냐만 공부 압박에 시달리던 청춘들을 잠시 설원에 풀어 해방의 시간을 갖게 해 주려는 것이 선생님들의 뜻이었겠지.
눈 내리는 속도가 제법 빨라지자 풍경들이 아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푸른 나무들도, 검은 현무암 돌담도, 돌로 지은 롯지도 모두 흰 옷으로 갈아입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에게는 행복해야 할 이유는 셀 수 없이 많고, 도저히 행복할 수 없는 이유도 그만큼 많다. 물 위를 걷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땅 위를 걷는 것이야말로 진짜 기적이라고 이야기한 스님이 있다. 이렇게 집에서 수만 리 날아와 깊은 산속의 대지 위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 발이 땅에 닿고, 이 다리에 팔팔한 힘줄과 뜨거운 피가 돌고 있는 것, 초라한 부엌의 난롯가에 앉아 무심히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것, 밥 한 끼를 주문할 수 있는 돈이 수중에 있는 것, 함께 길을 걸어주는 네팔 청년이 내 옆에 있는 것, 그로 인하여 처음 가는 길에서 길을 잃을 염려가 없는 것, 한순간에 세상의 만물이 변신을 할 수 있는 것, 숨을 쉬고 있는 것, 조용히 내 날숨과 들숨을 관찰할 수 있는 것 등등. 이 모든 것이 여기서 내가 행복해야 하는 이유이다. 시간이 한정되어 가보고 싶은 길을 끝까지 가지 못하고 돌아와야 하는 것, 어떤 사람들처럼 저 높고 파란 8,000m 고봉을 등반하지 못하고 골짜기만 걸어야 하는 것, 분단된 나라,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갈라져 분열의 진영을 이루고, 이성과 논리가 아니라 광기와 혐오로 뒤덮인 정치의 나라에서 사는 것, 이 먼 나라에 와서까지도 거리의 종교인과 정치가들의 주장과 대립으로 속을 끌이고 있어야 하는 것, 가짜뉴스와 프로파간다가 난무하는 언론정치와 이에 대응하여 포용과 토론이 아니라 절벽을 세우는 정치의 틀에 갇혀 있는 나라의 시민이라는 것 등등. 도저히 내가 행복할 수 없는 이유이다. 행복할 이유도 많고 불행할 이유도 많지만 결국 행·불행은 선택의 문제이다. 행복을 선택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양가兩價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먼 나라 깊은 산속 초라한 부엌에 앉아 깨닫는다.
고레따벨라는 랑탕의 일주문이다. 속세를 넘어 성역으로 들어가는 경계인 것이다. 불행의 요소를 버리고 행복과 맑음을 선택하기로 한다. 옷깃을 여미고 단속한 마음으로 일주문을 넘는다. 일주문을 넘어서면 천왕문이다. 엄청난 칼과 창을 들고 무시무시하고 분노한 표정을 짓는 사천왕을 모시고 있다. 눈을 부릅뜨고, 잔뜩 화가 난 듯 치켜 올라간 눈썹, 뭐라 소리칠 것 같은 입을 가진 조상彫像들이 발밑에 고통으로 일그러진 마귀들을 깔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조상들의 표정이 조금씩 다르다. 겉모습과 달리 온화한 인상의 표정과 험악한 표정이 함께 있다. 왜 상반되는 성격의 사천왕들이 같은 집에 있을까? 세상은 바로 양자兩者의 존재가 함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얼굴 전체가 분노의 불에 타오르고 눈과 입에서는 연기와 화염을 뿜지만, 얼굴에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한 표정을 짓는 상像도 있다. 비파를 연주하기도 한다. 무기를 손에 든 험상궂은 인물이라고 해서 다 악마라고 할 수 없다. 사천왕은 사람들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 자기 생을 바친 보살들이다. 험상궂은 보살은 굶주린 아귀들을 통제할 능력이 있는 보살이다. 사천왕문은 무섭지만 이상적 현실을 담고 있다. 서로 죽일 듯 반목하는 저 정치 광장에 사천왕의 진면목을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선이고 보살이며, 너는 거짓이고 악귀라는 식의 관점이 아니라 내 안에 보살과 악귀가 함께 있어 나의 보살이 나의 악귀를 누르기를 소망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험악한 얼굴에 진짜 보살이 살 수 있다. 모두가 불성을 가지고 있고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울그락불그락 거칠고 험한 상이라도 그 독하고 견고한 힘의 이면에 부드러운 마음과 깊은 이해를 지니고 있지 않을까? 어지럽다. 나부터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물론 고레따벨라에 실물의 일주문이나 천왕문이 서 있는 것은 아니다. 협곡을 벗어나 세계가 열린 고개에 타르초가 바람에 힘껏 휘날린다. 이 오색 천들은 법문法文을 바람에 실고 험상궂은 보살과 온유한 보살의 법력을 골짜기로, 마을로, 도시로, 그리고 마침내 온 세상으로 미천한 중생의 구제를 위해서 내달릴 것이다. 어쩌다 마음속에 이는 혼란과 망상이 사천왕상의 모습과 해석에까지 미치다니, 부엌 난롯가에 잠깐 앉아 졸고 있는 동안 빠진 백일몽이 좀 길어졌다. 멀리 왔어도 내 나라에서 끌고 온 번뇌를 떨칠 수 없다. 출발해야지? 2년째 나와 함께 걷고 있는 도움이 다와를 쳐다보니, 고개를 까딱한다. 오늘의 목표가 랑탕 마을까지이긴 하지만, 눈발이 점점 굵어지고 그치지 않는다면 중간에 당도한 마을에 머무르기로 하고 조금 더 가보기로 한다. 또 언제 눈 내리는 히말라야의 황홀에 갇혀 볼 수 있으랴! 눈 속에서 잠시 더디게 걸으며 방황하는 것도 나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하루 분량의 행복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