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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스테!(전종호)

요술공주 셀리 2023. 6. 17. 18:33

3,000미터 이상에서는 고산증이 오기 때문에 오전 일정만 잡고 여유 있게 천천히 걸었다. 덕분에 앞만 보기보다는 주위를 더 많이 돌아보게 되었고, 더 자주 찻집에 들려 차를 마셨고 주민들과 더 많이 대화를 나누었다. 문두 마을에서 어제저녁에 강진 곰파에 올라갔다 아침에 내려와 부엌에서 앉아 있는 노인을 만났다. 위 마을에 눈이 왔는지 묻고 함께 차를 마셨다. 불 앞에 앉은 일흔 노인의 옷을 보자 입성이 변변치 않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지금보다 그때가 온도가 더 낮았었는지 아니면 부실한 의복이나 가옥 조건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린 시절 하면 문고리에 손가락이 쩍쩍 붙던 겨울 추위가 먼저 생각난다.

드디어 목적지인 강진 곰파(3,860m)에 도착했다. 삭도 같은 좁은 협곡을 지나 대협곡을 거쳐 우주의 자궁에 도착했다. 하필 왜 그런 비유가 생각난 지는 딱히 모르겠으나, 오르면서 계속 우주의 몸 깊숙이 안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이었는데, 도착하고 보니 오래전부터 이 골짜기에 둥지를 튼 사람들도 그렇게 믿고 우주의 시원始源에 곰파를 들여놓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세계의 중심에 히말라야가 있고, 생명의 근원이 자궁이듯이, 히말라야의 가장 깊고 은밀한 곳에 신의 거처를 들인 것이다.

노자는 계곡을 신(谷神)으로 비유하면서 계곡은 마르지 않으며, 마치 가물한 어머니(여성) 같다고 했다(도덕경 6). 어머니의 문은 하늘과 땅의 뿌리이고, 끊이지 않고 면면히 이어지며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다. 산은 아무리 높다 해도 생명이 되지 못하며, 바람과 구름이 골짜기로 모여 물이 되어야 생명을 낳고 키울 수 있다. 서양인들이 에베레스트로 부르기 전에는 네팔 사람들이 어머니의 신이라는 뜻의 사가르마타로 우러르던 까닭이 다 있는 것이다.

롯지에 들어가기 전에 마을 입구에 있는 곰파에 들러 인사를 한다. 별일 없이 온 것이 다 덕분이라고, 그리고 내려갈 때까지 무사하게 해달라고 특별한 호칭도, 인칭도 없는 분께 감사와 부탁을 드린다. 어렸을 때 부뚜막에서, 뒤꼍 장독대에서, 강가에서 정화수 한 대접 떠 놓고 빌던 할머니의 비나리와 다름없는 일이다. 점심을 먹고 느긋한 마음으로 롯지의 햇빛 드는 창가에서 헤세의 시집을 펴고 읽는 듯 마는 듯하는 사이, 음 음 음 하는 낮고 조용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샤우지(주인 남자) 어머니의 진언 소리이다. ‘옴마니반메 훔’, 이 짧은 만트라는 그 의미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한 글자, 한 단어씩 묶인 소리의 결합이 모음조화인지 활음조 현상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듣기에 편한 울림을 준다. 헤세가 <싯다르타>에서 표현한 영혼의 후미진 곳에서, 지칠 대로 지친 삶의 과거로부터 경련하듯 부르르 떨며 울던소리다. 흔히 육자진언이라고 알려진, ‘, 연꽃 속에 있는 보석이여, 이라는 의미의 말은 특히 티베트인들의 관세음보살 진언이다. 뜻은 몰라도 진언이 울리는 소리가 마음의 평화를 준다.

난롯가에서 조는 듯하면서도 콩 까는 것이 예술적이다. 깐 콩들이 곱고 정결하게 한쪽에 잘 펴져 있다. 여기 사람들은 사는 것 자체가 예술적이고 종교적이다. 인사말부터 시작해서 진언이 그렇고 마니차와 마니석이 또한 그렇다. 집집마다 마니차가 있다. 마을마다 골목에 길게 마니석을 세워 놓았다. 부처님의 말씀이 새겨진 글 판을 돌리거나, 돌 판에 경전의 말씀을 새겨 오고 가며 말씀의 뜻을 새긴다. 마을의 배경이 되는 히말라야의 압도적인 서라운드가 이들에게는 마니석이요 부처님의 형상이요 말씀이다. 고개마다 타르초를 걸고 룽다를 세운다. 천 조각에 새긴 부처님의 말씀이 바람을 타고 널리 멀리 퍼져 세상이 모두 평안해지기를 위해 빌고 빈다. 모름지기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세상의 평화를 빌뿐이다.

나마스테라는 인사말은 이들의 세계관을 대표한다.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처럼 만나고 헤어질 때 쓰는 흔한 말인데, 말의 원래 뜻은 나의 신이 너의 신에게 인사를 드린다.’는 것이다. 신들이 삼만 삼천이나 된다는 이 나라의 생존법이다. 종교끼리의 경계가 분명하고 각각의 유일신끼리 전쟁을 벌이는 이른바 문명국가에서는 신들의 평화와 각각 신을 따르는 사람들 간의 화해와 이해를 도모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난롯가에서 무심하게 ‘옴마니반메훔’을 읊조리는 노파는 물론, 이 산중 사람들이 종교의 교리가 무엇인지, 교단과 종단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알 리가 없다. 종교를 이용하여 정치 세력화를 도모하는, 하나님도 까불면 혼내고 죽일 수 있는 광화문의 목사를 여기까지 와서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곤욕스러운 일이다. 종교는 본래 불안에서 발생했지만, 구원을 지향하는 것이어야 하거늘, 불안을 확대하고 조장하여 천년왕국을 종교지도자 개인의 정치적 영토로 세우려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종교는 필연적으로 우화寓話와 신비주의를 동반한다. 그러나 폐쇄(정태)적인 종교가 샤머니즘, 마법, 신화, 기적에 의존한다면, 생명의 약동을 진정한 역동성으로 보는 베르그송(Bergson)에 따르면, 개방(동태)적인 종교는 영성과 사랑과 같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이를 넘어서는, 기계론적인 지능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진정한 신비를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국적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고, 도대체 뭐 하다 온 놈인지도 모르는 처음 보는 인간에게 의심의 눈초리 한 점 없이 나마스테하고 인사하는 해맑은 노파의 얼굴에서 천국의 모습을 본다. 나남, 신앙과 불신, 종교와 종교, 연화장과 사바세계, 이것과 저것, 삶과 죽음을 구별하지 않아, 독사의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도 두려움이 없는 세계가 있다면, 그리고 이런 것이 천국이라면 바로 이 사람들이야말로 천국의 주민이지 않을까! 합장하며 나도 나마스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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