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김치찌개로 점심을 먹고 잠시 쉰 뒤 강진리 2봉에 올랐다. 일종의 고도 적응이다. 오전에 500미터를 올라왔고 내일 1,000미터 정도를 더 올라가야 하므로 오늘 오후 500미터쯤 더 올라 고도에 적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강진리가 뒷동산처럼 바로 앞에 뻔히 보이는데 오르는 길은 만만치 않다. 풀 한 포기 없는 메마른 흙과 자갈길을 밟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긴다. 고르던 숨이 턱턱 다시 차오른다. 오르고 내리는 사람을 피해 천천히 내 걸음 폭을 유지하고 간다. 아까 아랫마을에서 함께 올라왔던 사람 중에 먼저 올라간 사람들은 벌써 내려오는 중이다. 길이 옆으로 길게 지그재그로 나 있다. 눈도 없고 바람도 없는 밋밋한 길을 따라 두어 시간쯤 올라가니 정상이다. 4,350미터. 지난해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높이를 갱신했다. 정상의 타르초가 바람에 무섭게 휘날리며 애써 수고하며 올라온 사람들을 반갑게 맞아준다. 강진리 너머 랑탕리룽과 랑탕리룽 2봉이 눈 덮인 모습으로 코앞에 앉아 기꺼이 사진의 배경이 되어주고 있다. 산 위에서는 국적이 따로 없다. 대자연 앞에 모두 마음 문을 열어놓은 코즈모폴리턴이다.
산을 내려오자 횡재를 했다. 함께 올라온 한국인 트레커 팀으로부터 저녁 식사 초대를 받은 것이다. 그것도 한국에서도 몇 번 먹어보지 못한 염소 수육이라니! 초청해 주신 분들께는 맨입으로만 감사 인사를 하고, 그쪽 팀의 가이드와 요리사에게 약간의 사례를 했다. 모처럼 입에 맞는 보양식으로 배를 채우고, 화장실이 실내에 있는 쾌적한 방에서 누웠는데도 이상하게 잠은 오지 않았다. 달리 할 일도 없고, 밤하늘이 궁금해서 가만히 밖으로 나갔다.
아악! 추위가 아니라 별이, 별들이, 별빛이 숨을 탁 막아 버린다. 찬란하다는 말은 맞지 않는 말이다. 축제랄까 광란이랄까 말 그대로 환상幻像의 세계다. 별자리를 잘 모르는 내게는 점, 점, 점, 점의 환상環狀이었다. 이런 별무리를 언제 보았었지? 유년의 시절, 안마당 멍석 위에서 본 별밤? 그때는 별이 이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한 뼘쯤, 손바닥 하나쯤? 장터목 산장에서 탄성을 질렀던 지리산 꼭대기 하늘의 별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입을 다물 수 없다. 한 발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온통 칠흑의 어둠 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얼굴을 내릴 수 없었다. 추위를 무릅쓰고 마당 앞의 의자에 앉는다. 히말라야는 산도 계곡도 하늘도, 참, 별까지도 대단하다. 아니 위대하고 위대하구나.
언제부터 우리는 별을 볼 수 없었을까? 아니 별을 잊고 살았을까? 생각해 보니 별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별을 내쫓은 것이다. 낮이나 밤이나 제 마음에게 하늘 한 번 볼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았으며, 도시의 인공 불빛이 자연의 빛을 쫓아낸 것이다. 어둠이 있어야 별이 빛날 수 있으련만, 우리는 애써 어둠을 쫓아 내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꿈을, 동경과 이상을 잃어버렸다. 시인 윤동주가 가을밤 하늘 속에 애타게 찾던 별을, 별을 헤아리는 마음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는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한데 우리는 별을 헤아리는 법이 아니라 별 자체를 잊은 것이다. 우리가 별을 헤지 못하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도 아니고, ‘내일 밤이 남은 까닭’도 아니고, 더구나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이 아니라, 먹고살기 위하여, 남보다 더 낫게 살기 위하여, 남보다 한 칸 더 위에 서기 위하여 하늘을 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 하나에 추억’도 ‘별 하나에 사랑’도, ‘쓸쓸함’도, ‘동경’도, ‘시’도, ‘어머니’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 책상을 마주했던 친구들의 이름도, 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동료들도, 가난한 이웃들의 이름과 비둘기, 노루, 노새들의 동물의 이름은 물론 프랑시스 잠이나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같은 시인 따위를 동경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이네들은 멀고, 어머니 또한 멀리 북간도에 계신 정도가 아니라, 벗도, 어머니도, 이상도 아주 깡그리 잊은 채 도시에, 고층빌딩의 빛에, 이윤추구의 주문에 우리 혼을 쏟아 버린 것이다(별 헤는 밤).
윤동주가 이 시를 썼던 시기는 식민의 시절이었다. 이제 나라가 독립되고 번영을 이루었는데도 탐욕은 멈추지 않는다. 마음들이 모두 갈라졌다. 광화문과 서초동 사람들은 다른 국민인 것 같다. 우리도 한때 시인 도종환처럼, “별들이 우리를 보며 눈빛을 반짝이는 거라고 믿었고”, “밤마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꿈꾸었으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은 모두 선한 씨앗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사랑이 손짓해 부르면 그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했고, “물불 안 가리고 사랑의 강물에 뛰어들었다/ 이길 수 없는 것들에게 싸움을 걸었다/ 판판이 깨지고 나서도 지지 않았다고 우겼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데도 희망을 이야기 해”던” 적이 있었다. “견딜 수 없는 걸 견디면서도 사람들에게 포기하지 말자고 편지를 썼다/ 이 길을 꼭 가야 하는 걸까 물어야 할 때/ 이 잔이 내가 받아야 할 잔인지 아닌지를 물었었다.”
“우리가 꾼 꿈이 이루어지는 것인지/ 별에게 묻고 별이 대답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꿈꾸고 사랑하고 길을 떠나자고 속삭였었다"(별을 향한 변명).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는 별을 잊고 살았는가? 하늘에 별이 빛나지 않아서? 별이 너무 멀리 있어서? 우리가 도달하기에 너무나 먼 당신이기 때문에? 아니다. 별이 빛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속의 빛을 잃었으므로, 우리가 꿈꾸지 않아 스스로 빛을 내지 못했으므로 별을, 별빛을 잃은 것이다. 그리하여 ‘낮에 잃은 것을 밤에 돌려다오’라고 파우스트처럼 절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졌다. 모처럼 별천지에 와서 숨이 멈출 듯한 별무리 아래서 평상심을 잃고 말았다. '서로가 별이 되어주는 세상을 만들어 가야지', '우리 모두가 피어난 꽃이니 꽃대를 세우고 꽃대마다 별을 달자', 혼자 별 아래서 중얼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