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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정을 포기하고 돌아온 롯지는 평온하였다. 고산병 때문에 산을 오르지 못한 한국인 여성은 방 안에서 조용히 쉬고 있고, 부인이 쉬는 사이 남편은 강진리에 올랐다. 오직 귀먹은 80 노파만이 난롯가에 앉아 콩을 까며 옴마니밧메훔 하며 독경을 하고 있었다. 집안의 물리적인 고요뿐만 아니라 등정에 실패한 사람답지 않게 내 마음도 평온의 물결이 흘렀다. 접대할 사람이 없으니 쿡도 포터들도 한가하다. 몇몇은 구석에서 포커를 하며 시시덕거리고 있다. TV도 없고 신문도 없어 세상은 조용하다. 구태여 와이파이를 켜고 심란한 서울 소식을 불러들일 필요는 더더욱 없었다.

이 모든 것들을 모른 체하고 볕이 바른 식당의 한구석을 찾아 누워 헤세의 시집을 읽는다. 이번에 올 때 배낭에 넣어 온 유일한 책이다. 방랑의 작가 헤세. 스스로 방랑의 삶을 살았고, 정신적 방황과 방랑의 삶을 통해 아브락사스의 세계를 소설에 썼다. 그의 작품에는 반드시 직업 없이 떠도는 방랑자(wanderer)들이 등장한다. <데미안>의 싱클레어와 데미안, 피스토리우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골드문트가 그들이다. <싯다르타>의 싯다르타도 진리를 찾아 끊임없이 떠돌아다닌 자로서 선악을 넘나들며 결국 헤세는 실용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유리알 유희>의 세계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헤세나 그의 작품 속의 방랑자들이 모두 나의 떠돌이 스승들이라고 할 수 있다. 헤세의 시집 한 권을 들고 온 이유도 그게 아니었을까. 산중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모두 떠돌이다. 떠돌이는 두 부류다. 하나는 희망을 좇아 온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절망에 쫓겨 온 사람들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심으로 온 사람들, 등정의 높이를 갱신하기 위해 온 등산가들, 밝은 앞날의 계획을 위해 온 사람들은 아마 전자의 부류들일 것이고, 사랑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 무언가에 실패하고 온 사람들, 죽음을 찾아온 사람들, 세상의 눈을 피해서 숨어든 사람들은 후자의 부류들일 것이다. 전자의 사람들은 산에서 몰려다니고 후자의 부류는 대개 혼자서 다닌다. 나는 10여 년을 혼자 산에 다니면서 나 같은 사람을 많이 봤다. 산 아래 내려와 막걸리라도 한 잔 하게 되면 비슷한 신세를 금방 확인하게 된다. 슬픔과 쓸쓸함은 서로를 금방 알아본다.

나를 산으로 이끈 것은 절망이었다. 절망이 나를 떠돌이 방랑자로 만들었다. 인생이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우연이 필연이 되는 경우가 있다. 별 볼 일 없는 어떤 한 사건이, 전혀 예상치 않은 어떤 질병이, 영양가 없는 어떤 한 사람이 인생에 개입해서 말 그대로 속수무책束手無策, 손을 꽁꽁 묶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나쁜 일은 동시에 온다. 아니 나쁜 일은 연쇄적으로 더 나쁜 일의 꼬리를 물면서 온다.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던 친구(친구 맞나?)의 사업에 엮여서, 아니 사실은 그놈의 치밀한 계산의 그물에 걸려서 세상 물정 모르는 선생이라는 놈이 감당할 수 없는 빚의 올무에 걸려든 것이다. 나름 이치를 따지며 살아온 사람에게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의 황당함이란! 아주 친한 친구였다고 하면 억울하지나 않지, 그리 친하지도 않은 녀석에게 퍼부었던 돈의 향연을 제정신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뭐에 쓰이지 않으면 생길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거짓말을 사실처럼 말하는 교묘한 놈에 대한 배신감, 스스로 감당하고 갚아야 할 엄청난 돈의 무게보다도, 더 치욕적이고 용납할 수 없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경멸감이었다. 상황과 사람에 대한 판단력이 그것밖에 안 되냐? 배웠다는 놈이? 남을 가르친다는 놈이? 평생 모든 돈을 남의 입에 한 방에 털어주고 자식들을 가난과 굶주림에 빠뜨린 아버지의 실수를 반복하다니!

절망은 나를 산으로 이끌었다. 절망을 치료받기 위해 상담한 의사 친구의 권유에 따라 병원 대신 선택한 것이 산이었다. 비상구랄까. 주말마다 산을 찾아다녔다. 처음에는 집 가까운 산에 혼자서, 나중에는 산악회 차를 타고 멀리까지, 산악회 회원들과는 거리를 두고 혼자서 전국의 산들을 찾아다녔다. 산을 오르는 일은 몸을 학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죽을 자리를 찾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주중에는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일을 통해 삶을 소진하고, 주말에는 전국의 산을 돌아다니면서 학대한 세월이 거의 10여 년이었다. 받을 것을 포기하고 갚을 것만 생각하기로 하자 길이 보였다.

산과 친해지면서 말을 걸어오는 산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사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죽는 일도 쉽지 않다. 저 하찮은 풀 하나, 자그마한 꽃 하나도 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시들고 죽는 것은 풀과 꽃의 몫이 아니다. 좋은 것 같이 보이는 것만 보고, 아는 대로만, 옳은 대로만, 관심이 있는 대로만 살 수 있느냐. 고급 슈트를 입고 점잖게 사는 사람들은 다 좋은 것만 품고 사는 줄 알지? 알고 보면 성한 놈은 하나도 없다. 수백 년을 살며 견뎌온 저 고목들을 봐라. 아직 세계의 바닥은 보지도 못했으면서 네가 서 있는 자리가 바닥이라고 생각하지. 슬픔이 절망을 다독이는 소리를 들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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