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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눌노리 40
말만 하면 건축설계사가 집을 지어주는 줄 알았다. 아니 말을 하지 않아도 설계사가 알아서 도면을 그려주는 줄 알았다. 평생 아파트에만 주로 살아서 규정된 주택 규격에 맞추어 살 줄만 알았지 내가 어떤 공간을 필요로 하는지 내게 필요한 공간이 무엇인지 몰랐다. 선다형 시험에 익숙한 사람이 논술형 답안지를 보고 당황한 꼴이라고나 할까? 생각하고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산다더니 이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건축사 앞에 앉아서야 우리가 살 집의 모양이 어떠해야 할지, 어떻게 지어야 할지, 우리에게 필요한 집이 어떤 집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집을 생각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앞에서 한 번 얘기한 바처럼, 건축사와 첫미팅을 하기 전에 건축사로부터 집짓기 기초 설문을 받고도 나는 사실 약간 당황했고, 크게 무덤덤했었다. 내가 아는 집 짓기는 통상대로 돈만 내면 건축업자가 알아서 지어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건축사와 미팅을 해야 하는 것도 몰랐고, 그것도 10여 차례 이상 예정되어 있는 것도 몰랐다. 아니 그것보다 작은 집을 짓고자 하는 우리 형편에 비싼 설계비를 내고 집을 짓는지 몰랐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첫 미팅은 인왕산이 손에 잡힐 듯한 서촌의 사무실 옥상에서 있었다. 건축사 부부와 우리 부부, 두 쌍의 부부가 겸재의 인왕산수도와 똑같은 풍경을 앞에 두고 차 한 잔을 마시는 것으로 시작했다. 명함을 주고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건축사가 난초 그림 하나를 복사해서 가져왔다. 마을 마스터플랜을 설명하기 위해 PPT자료를 띄울 때 있었던 그림이다. 이 그림은 건축가가 이 마을 건축의 플랜을 머리 속에 두었을 때 선택한 그림이었다고 한다. 그 그림에 대한 설명, 선택의 이유 등을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저 PPT자료 첫페이지를 장식하는 그림인 줄 알았는데 이 그림에 건축가의 마을 구상이 숨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당장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설명을 부탁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컴퓨터 책상 뒤 유리창에 붙여 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난초의 선과 방향과 배경 등을 들여다보곤 했다.
집의 설계도는 행정상 필요한 하나의 문서가 아니라, 집의 영혼과 가족의 삶의 모든 쓰임들이 녹아들 수 있는 기본 계획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학문이나, 그림이나 시와 같은 예술의 창조성을 주장하고 인정하는 것처럼, 건축설계 작업의 창조성과 그 지적 재산권을 설계비로 보장해 주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다고 뒤늦게 생각하게 되었다. 대량생산을 찍어내는 싸구려 설계도가 아니라 비록 작은 집이지만 우리 가족에게 맞춤한,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집의 설계도를 그리는 것이니 그 작업의 노고를 인정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고 또한 옳다. 좋은 집이 만들어지는 대전제이기 때문이다.
첫 미팅에서 땅의 모양이 삼각형이니 집은 일자형이 아니라 ㄱ자로 꺾이는 모양으로 하자는 합의를 하고 계약을 하고 돌아왔다. 집은 건축사와 건축주가 함께 짓는 공동작업(collaboration)이라는 것을 배운 시간들이었다. 여기에서 어떻게 살 건데? 익숙하지 않은 질문에 답을 스스로 찾아야 하는 시간이다. 아이들도 없고, 둘이서 출근도 하지 않고 더 오랜 시간 집에서 머물러야 하는데, 지어진 집에 맞추며 살고 출근했다가 퇴근하고 베드하우스 그 이상의 개념을 생각하지 못하고 살던 내게 새로운 질문이 생겼다. 어떤 집에서 살고 싶어? 집이 우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집을 규정하고 집에서 삶이 가능하도록 생각을 해야 한다. 시골에 세워진 또 하나의 아파트가 아니라, 땅 위에 세워진 새로운 개념의 집을 상상해야 하는 것이다. 건축학 개론 수업의 1교시가 끝났다.
참고 *건축사 설문 내용
01. 사주 혹은 출생 연도 & 띠 & 이름 :
02.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란 곳(기억나는 것만 작성하시면 됩니다.) :
03. 필지 선정 이유 : 아래 항목을 참조하시어 삭제 혹은 추가하세요.
04. 이 마을에 집을 짓고 살고 싶은 이유 : 아래 항목을 참조하시어 삭제 혹은 추가하세요.
05. 내 집 내 마당에서 꼭 하고 싶은 것. : 아래 항목을 참조하시어 삭제 혹은 추가하세요.
06. 이웃과 꼭 하고 싶은 것. : 아래 항목을 참조하시어 삭제 혹은 추가하세요.
07. 꼭 실천하여 언젠가는 반드시 실현하고 싶은 아래의 6가지(가나다순)를 중복되지 않게
08. 반드시 구획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방의 개수와 화장실의 개수
09. 일단 1층 만은 최대 건축면적인 24평은 짓고 싶은지의 여부. (공동명의 부지는 1층이 48평까지 가능함으로 예, 아니오가 아닌 24평 이상의 최대 면적을 기입해주세요.)
10. 아래 4가지 중 다소 비용이 든다 해도 꼭 갖추고 싶은 자신만의 로망을 기입해 주세요. : 해당 항목만 남기고 기타 더 필요한 항목은 추가하고 나머지는 삭제하시기 바랍니다.
11. 비용을 더 들여서라도 꼭 갖춰야 할 사항 : 해당 항목만 남기고 기타 더 필요한 항목은 추가하고 나머지는 삭제하시기 바랍니다.
12. 이외 궁금하신 혹은 부탁하고 싶은 사항들을 두서없이 기술해 주시기 바랍니다. 특별한 사항이 없으면 ‘없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