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어쩌다, 눌노리 63
사실 공사 현장에 출근하면서 눌노리의 하루를 경험해 보고 싶었다. 몇 개월 후에 이 집에서 맞이할 하루를 먼저 체험해 보고 싶었다. 파평산 넘어 동트는 아침 해를 보고 놀노리 마을과 들판을 두루 비추는 낮의 해의 역사役事를 살피고 마을 옆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의 휴식, 하루의 전 일정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구부러진 마을 고샅길을 걸어보고, 길로 이어지고 맞붙은 집을 따라 사시는 동네 사람들의 삶을 살피고 싶었다.
아침 해 보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오늘은 일꾼들이 퇴근한 후 아내와 둘이 마을의 어스름 속에 남아 있었다. 아주 낮게 날면서 우는 기러기의 울음인지 노래인지 그 소리를 들으며 기러기의 삼각편대를 본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기러기의 소리를 듣는 것은 처음이다. 뒤이어 까마귀 떼처럼 하늘을 뒤덮은 기러기떼의 군무가 흔들리며 다가온다. 기러기는 혼자서 빠르게 가 아니고 함께 멀리 나는 새라는데,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시간이 순간에 사라지고 뒤에는 묘한 여운이 남는다. 다음에는 산 가까운 들판에 가서 저들의 한낮 동태를 살펴보아야겠다.
마을은 어둠 속으로 잠기고 있다. 집집마다 전등불이 켜지고 있지만, 노인들 혼자 또는 둘이서 밝히는 전등은 불빛이 약하다. 칠흑의 정도는 아니지만 도시와는 달리 마을의 어둠이 깊다. 마을은 어둠 속에 잠긴다. 좀 더 밝은 별빛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파평산은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었고 마을 옆으로 작은 하천, 각색천은 쫄쫄쫄 소리를 내고 흐르고 있다. 저 소리는 좀 더 가서 눌노천으로 들어가고 더 가서 임진강에서 합류하여 바다로 힘차게 내달릴 것이다. 강 건너에는 동파리 해마루촌이 있고 거기에는 누구보다 임진강을 사랑하고 임진강의 식생과 문화와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임진강 농부 이재석 씨가 살고 있다. 재두루미가 왔어요? 낮에 물으니 두서너 마리씩 빈 땅에서 어울려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기품 있는 두루미들의 군무를 연상해 본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고 하지 않았나. 두루미가 바로 학이고 옛날 양반춤이 학춤이다. 눌노천 옆으로 파산서원이 있다. 서원철폐를 강행한 대원군 시절에도 살아남은 사액서원. 대성전을 앞을 지키는 한국전쟁 때 불탄 고사목만이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이 소를 타고 놀러 오고 갔다는 옛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눌노리訥老里는 파평산과 임진강 사이에 있다. 말이 어눌한 노인 몇이 살고 있어 눌노리가 되었다는 마을. 설마 실제 말이 어눌해서였을까? 시답잖은 것들 우글거리는 세상에 굳이 말을 더 보태기 싫어 입을 닫은 것은 아니었을까? 도덕경에 눌변訥辯이 대성大聲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 또한 가능하면 입을 닫고, 아니면 땅의 기운을 느끼며 천천히, 그리고 어눌하게 눌변의 늙은이訥老로 살아가야 하리라. 택리지擇里志, 즉 마을을 고르는 근거로 지리, 인심, 천심, 생리를 들었던 이중환도 나라에 사람 살만한 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살만한 마을을 스스로 만들어 살아야 한다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