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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눌노리 64

 

도면은 말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그 말들을 체감하기는 쉽지 않다. 대지 분할 도면을 볼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생소한 것들이 토목공사를 하면서 땅이 윤곽을 드러내고 분할된 땅에 경계석이 놓이자 땅의 느낌들이 확 다가온다. 앞 땅 뒷 땅이 나누어지고 땅 위에 햇빛이 비치자 밝은 땅과 어두운 땅이 드러난다. 도면에서는 상상에 그쳤던 앞 뒤의 조망이 드러나고 도면의 평면이 풍경의 입체를 불러온다.

 

마찬가지로 기초 콘크리트를 하고 그 위에 목재의 토대 잡기를 했을 때만 해도 집은 평면의 대지에 불과했는데 토대 위에 벽체를 세우기 시작하자 비로소 집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지진에 무너진 그리스 신전의 기둥과 같은 한 세트의 벽체를 한 면에 올리자 집의 윤곽이 드러난다. 수직이 주는 느낌, 나무가 다시 서는 느낌 같은 것이랄까. 내가 현장에 가기 전에 이미 이 분들이 아침에 일찍 나와 벽체 하나를 완성해 세운 것이다.

 

바닥에서 한 면의 벽체를 조립해서 세우는 방식을 층식 구조(platform framing)라고 한다. 이전에는 벽을 구성하는 샛기둥(스터드, stud)1층부터 지붕까지 연결하여 벽체를 만들고 각층으로 구획되는 부분에 보강 블록을 사용하여 방화 블록 역할을 하도록 한 일체식 구조(balloon framing)를 주로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대부분 층식 구조로 집을 짓는다고 한다. 층식구조는 먼저 바닥구조를 만든 후 필요로 하는 벽을 별도로 만들어 바닥에 세우는 방식이다. 내부에 들어가는 밑깔도리와 윗깔도리는 천장과 바닥에 화재가 났을 때 불이 번지는 것을 막아주는 방화 블록으로서의 기능도 한다.

 

설계도면에 나와 있는 치수대로 정확히 표시를 하고 거기에 샛기둥을 아래위의 깔도리에 붙이는 작업이 예사롭지 않다. 이 벽체 안에 창이나 문과 같은 개구부開口部가 정확히 반영되어야 뒤의 창호 작업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개구부에는 헤드를 박아 뒤틀림과 변형을 방지한다. 도화지에 그림 하나를 그리거나 도면을 베낄 때도 제대로 거리나 면적을 제대로 계산하지 못하여 지웠다 그렸다를 반복하던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참으로 놀라운 경지라고 할 수 있다.

 

현장은 치수를 정확히 재는 사람, 표시된 치수대로 목재를 재단하는 사람, 치수대로 스터드를 박는 사람, 목재를 옮기고 들고 하는 사람들이 정확히 분리되어 질서 있게 움직인다. 이들의 역할과 균형 맞춘 작업들을 통해 사면의 벽들이 제대로 서가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멀리 서서 지켜보는 일, 수고하신다 고맙다 말을 건네며 사 가지고 온 음료수를 건네드리는 것 말고는 없다. 아니 뭘 하려고 하기보다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는지도 모르겠다. 아하!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것이 사람과 자연에 도움이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오늘 배운 것처럼. 대낮 논밭에서 기러기 떼가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가까이 갔다가 수백 마리의 기러기를 한꺼번에 날려 버려 그들의 평화와 먹이 활동을 방해했던 오늘 일을 후회하면서. 참 민망하고 난망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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