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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노리 산책/피란(전종호)

요술공주 셀리 2023. 10. 28. 09:22

이 어지러움이라면 전쟁만이 난리가 아니다. 실속없이 분주한 일에 치이는 것도 난리고, 선택적 기억을 통한 말의 오해와 왜곡과 난해도 난리다(말과 글을 일로 하고 살아온 나같은 사람의 숙명이여!). 국민의 마음을 어지럽히기 위해서 정치하는 것 같은 얼치기 정치인들의 심오한 행위는 더 큰 난리다.

이럴 때는 우선 입을 꼭 다물고 눈을 부릅뜨고 어지러움을 지켜보며 잠시 피하는 것, 즉 피란避亂이 상책이다. 자리는 반드시 십승지가 아니어도 좋겠다.

이삿짐을 옮기고 며칠동안 받아야 할 물건들을 기다렸다가 받아놓고 오늘, 새벽에 도적처럼 도망하여 속초 아바이마을 바닷가 <카페 청호동>에 앉아 멍을 때리는 중에 유기택 시인의 시를 읽는다. 내 마음이 바로 이 마음이다.

 

<슬픔의 독법>

사는 일의 반절은 기쁨

그 남은 일의 또 절반은 슬픔

슬픔의 독법은 등을 읽는 것

가끔은 등을 읽자

기쁨으로 가려진

우리를 위해서라고 해도 좋다

얼른 감춘 것들의 대개는

등 뒤 엉성히 모여 지내는 편

누구를 안아주는 것도

등에 숨긴 걸 어루만지는 일

가슴으로 안아준다는 말은

반만 맞아

보면 종종 안겨 오는 너도

너의 슬픔을 기대 보는 것

구부린 등을 쓸어주다 보면

기우는 슬픔의 무게를 안다

등은 그 모든 걸 다, 어떻게

기억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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