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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정록은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고 했다. “고추에는 고추 벌레가/복숭아 여린 살 속에는 복숭아벌레가/처음부터 자기 집이었으므로/대물림의 필연을 증명이라도 하듯/잘 어울리는 옷으로 갈아입으며/집 한 채씩 갖고 산다/벌레들의 방은 참 아득하다”
벌레의 집은 벌레에게는 아늑할지 모르지만, 집을 나온 날아다니는 벌레는 사람에게는 아늑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귀찮고 성가신 존재다. 더욱이 아파트와는 달리 시골(마을) 생활에서는 벌레가 큰 문제다. 끊임없이 얼굴과 손에 발에 달라붙는 파리는 아주 성가신 존재이고 모기는 그러지 않아도 잠들지 못하는 밤의 공포, 그 자체다.
아직 모기의 피해를 보지는 않고 있지만, 문을 열 때마다 몇 마리씩 들어온 파리를 잡는 것이 일이다. 집에 있는 파리채 하나로는 어림도 없어 방마다 하나씩 파리채를 샀다. 딱! 딱. 딱! 아내는 부엌에서 나는 책방에서 하루종일 파리를 잡는다. 불살생이 현자의 가르침인데 날마다 살생이다. 생명의 고리를 인정하라는 생태학적 사고의 배반일까? 도시의 방역시스템으로 유지되지 않은 시골에서 파리가 많다는 것은 생태계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일까?
나는 시골에서 파리를 잡고 도시에서는 오늘도 많은 노동자들의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저당 잡혀 살고 있다. 사람 목숨도 똥값이고, 누가 죽어도 하나도 놀라지 않는 무감각한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 노동자들의 파리 목숨을 안타까워하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늘도 파리를 잡는 나라는 인간은 도대체 무엇일까?
파리
허무하게 쉽게 죽는 생명을 파리 목숨이라고 하는 것이
목숨이 가볍기 때문인지 파리가 하찮기 때문인지는
내 알 도리가 없으나 날마다 노동자들이 저리 쉽게
떨어져 죽고 끼어서 깔려서 죽고 부러지고 다치고
일하는 사람이 죽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것은
사람 목숨을 발바닥의 때만도 못하게 여기는 것이니
작은 파리는 너무 우습게 보고 돈만 아는 애들이나
어른들이나 개나 소나 있지도 않은 용이 되고자
낮이나 밤이나 장한 용꿈을 꾸고 있는 까닭이다
파리가 얼굴에 붙어 성가시게 해도 귀찮아 말고
용처럼 귀하게 대접하고 내친김에 파리 목숨을
용 목숨이라고 바꿔 부르면 사람 목숨도 귀하게
여기지 않을까 잠자다 헛꿈을 다 꾸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