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관찰
정장직의 ‘무제’
자연미술의 선제 조건은 풍부한 자연과의 교감이다. 그러나 우리는 넓은 의미의 자연 속에 살지만, 자연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더구나 도시공간은 아쉽게도 더욱 제한된 자연이 있을 뿐이다. 오래전 어느 학생이 “저는 도시의 아파트에서 살다 보니 자연을 접할 기회가 없습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라고 물었다. 나의 답은 “음 그렇구나! 그렇다고 시골로 이사 가는 것은 어려울 것이고, 아침마다 창문 밖의 하늘을 보는 것은 어떨까? 매일 다른 하늘이 보이겠지? 등굣길이나 학교 운동장의 나무를 잘 살피거나 작은 화분에 씨앗을 심고 아침마다 물을 줘봐. 씨앗의 촉이 트는 순간부터 하루하루 다른 모습을 보게 될 거야.”
자연의 관조(觀照)는 자연과의 교감을 깊게 한다. 나아가 관찰의 관점을 변화시키는 것도 조형사고의 한 방법이 된다. 식물은 광합성을 위해 햇빛을 따라가며, 물고기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유선형으로 진화했고, 새들은 날기 위해 뼛속을 비윘다. 이러한 특성들이 자연의 이법이고 질서인 것이다. 우리는 자연체험을 통해 자연의 이법(理法)을 배우고 그 경험들을 표현의 동력으로 삼으면 매우 유익할 것이다.
몇 해 전 헝가리의 시골을 여행하다 해바라기꽃을 보았다. 아침 해바라기꽃은 일제히 동쪽 하늘의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석양의 해바라기꽃은 모두 해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발견한 자연의 질서는 “해바라기조차 지는 해는 좋아하지 않는다!”였다. 이렇게 체험적으로 인지한 소스들은 표현의 모티브로 유용하게 활용될 자산이다. 자연 속에는 다양한 생명들이 존재하며 각각의 생명들은 그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있으니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티브도 무궁무진하지 않겠는가?
자연의 생명성과 질서를 인지할 때 우리는 ‘지배하는 자연으로부터 함께하는 자연’으로 태도를 바꿀 수 있으며, 이 발상의 전환은 우리에게 새로운 눈(제3의 눈)을 뜨게 해 줄 것이다. 자연은 결코 물질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이 지구에서 같이 살아갈 존재’라고 인식할 때 자연은 비로소 우리의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이동구의 ‘수직 – 빗살’
표현
표현은 모든 예술의 핵심 요소다. 오직 표현을 통해 예술은 그 빛을 발산할 수 있다. 미학적으로 우리의 표현행위는 외부 자극에 의한 내적 생명성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예술의 ‘형상관계’라고 하며 ‘사고과정’이 그 중추가 된다.
초기 야투의 ‘사계절연구회’에 참가한 작가들은 자연 속에서 공동으로 시간을 보내며 자연으로부터 모종의 자극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또는 “이것도 말이 되는가?”라고 반신반의하며 다각적으로 연구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기도 하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교과서나 선험자(先驗者)의 안내 없이 그들의 구도자적 행위가 지속될 수 있었던 힘은 자신들의 결과물에 대한 믿음과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이었다.
1982년 가을의 ‘사계절연구회’는 단풍이 절정에 이른 공주산성(公州山城)에서 개최되었다. 산성의 곳곳에는 세월을 거슬러 온 듯 오래된 역사의 흔적들이 남아 있고 쾌청한 하늘이 보이다가 가을비가 내리거나 안개가 짙게 깔리는 등 날씨도 변화가 많아 좋은 작업들이 속출했었다.(참가작가 ; 고승현 김명식 김원희 나경자 신남철 이계길 이기방 이동구 이응우 정장직 허강)
당시 이동구는 울긋불긋 물든 단풍나무에 폭 15cm의 기다란 흰 천을 걸치고 수직과 사선이 되도록 당겨 - 딱 부러진 본인의 성격처럼 - 반복적으로 설치한 ‘수직 – 빗살’을 발표하였으며, 이기방은 Y자 모양의 나뭇가지에 우산을 매달고 우산 밑의 낙엽을 우산 위에 올려놓아 마치 빗물이 누적된 듯한 매우 시적인 작업 ‘우산과 낙엽’을 발표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정장직은 아카시아나무의 줄기를 실로 감은 뒤 표피의 결을 따라 먹물로 칠하는 작품을 했다.
그 가을 나는 큰 느티나무 밑 공간을 활용해 은박으로 코팅된 테이프를 나무와 나무 사이에 여러 겹으로 기다랗게 매어 놓는 설치작업 ‘움직임’을 발표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은색 테이프가 강한 빛을 발산하며 좌우로 크게 움직이는 이 작업은 농부들이 들판에서 새를 쫓는 방편을 차용한 것이었다.(이 작품은 1988년 2월 스위스 쮜리히에서 발간되는 미술잡지 ‘Kunst Nachrichten’에 한국의 ‘야투’가 특집으로 소개될 때 잡지의 표지로 선정되었다.)
이응우의 ‘움직임/Movement’ 1982
· 출처 : 중앙교육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