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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투 초기의 명칭은 “야투야외현장미술연구회”였다. 야투(野投)는 ‘들에서 던진다. 또는 자연에서 표현한다.’는 뜻으로 농구용어에서 차용된 것이다. 그리고 꼬리처럼 붙은 “야외현장미술연구회”는 도시 또는 인위적 공간이 아닌 산과 들, 즉 자연현장에서 미술을 연구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들은 밖으로 나가 평소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의 자연과 마주했다. 그것은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의도에서 자연과의 만남이고 교과서나 강의실 밖의 일이었다. 야투의 동인들이 만나는 자연은 전통적으로 인식된 표현의 대상이 아니라 자연이 작품 속에서 적극적으로 작용하거나 직접 표현에 관여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들은 그 모임을 “사계절연구회”라 명명하고 자신들의 행위를 자연과의 동행이라 했다.
이종협 - 일출 인상
1981년 처음 시작은 20대 초반에서 30대 중반까지 20명이 참가했으나 창립전 후로 대부분 나이가 많은 선배들은 생활의 터전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소수의 나이 어린 후배들이 자신들의 용돈을 아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장소를 옮겨가며 연구회를 이어갔다. 그들은 대부분 공주 대전 청주 등 충청지역의 젊은 대학생이거나 대학을 갓 졸업한 지방대학 1세대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의 영향보다는 자신의 지역을 기반으로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나는 1982년 봄 제대 후 복학을 앞두고 제4회 사계절연구회(당시 공주의 청벽 백사장)부터 다시 참가했으며, 이 여름 연구에는 15명의 회원(고승현 고현희 신남철 유동조 안치인 이동구 이기방 이두한 이응우 이종협 전원길 정장직 지석철 허강 홍오봉)이 함께했고 이들 중 9명이 대학 재학 중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안타깝게도 일부 회원은 이미 유명을 달리한 분도 있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당시의 현장 청벽(靑壁)은 공주팔경 중 하나로 깍아지른 듯 높은 절벽 아래 푸른 금강과 백사장이 있는 곳으로 우리들의 다양한 감성을 이끌어줄 것으로 기대되어 선정한 장소였다.
그때의 현장 분위기를 회고하면, 야투의 회원들은 연구회에 앞서 가상작업을 미리 스케치하거나 시장에 가서 필요한 품목들을 사두는 등 사전준비(?)를 위해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후 돌이켜보니 준비한 오브제를 활용하려는 태도는 현장의 다양한 소스들을 탐구하는데 오히려 장애가 되었었다. 또한 현장에서의 작업은 열린 공간이기 때문에 서로의 작품을 보게 되므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부담으로 인해 생각처럼 작업이 풀리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남들은 ‘햇볕에 그을린 피부를 활용한 작업(고승현)을 하거나, 물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이용한 작업(신남철), 갈대숲에 방울을 매달아 바람과 소리를 연결하는 작업(고현희), 수백 개의 소주병을 백사장에 각각 방향이 다르게 꽂아 바람을 이용한 음향작업(유동조), 파이프를 산처럼 구부려 안개 속 떠오르는 해를 재현한 작업(이종협) 등 실내에서 경험하지 못한 작업들을 쏟아냄으로써 현장의 동료들에게 자극이 되기도 했었다. 돌이켜 보면 40여 년이 지난 오늘도 어떻게 그런 작업이 나왔는지 믿기 어렵다.
고현희(풀잎에 방울을 달아 갈대가 흔들릴 때 방울소리가 나도록 함)
나는 강물과 백사장의 경계를 따라 미리 준비한 비닐에 물을 담아 ‘물덩이’를 놓거나 가느다란 철사를 모래에 꽂는 등 사전 계획된 작업을 했으나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현장성을 살려 물살에 의해 떠내려가는 퍼포먼스 작업을 했지만, 수중촬영도 아니고 더욱이 사진으로 기록하고 보니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것’에 불과했다. 최대한 멀리까지 떠내려가기 위한 노력과 몸짓 표정 없이 ‘입수’와 ‘출수’로는 감동을 자아낼 수 없었다.
유동조(백사장에 부는 바람을 활용하여 병목에서 생성되는 휘파람 소리를 작품화 함)
야투의 초기 현장연구 중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다름 아닌 야영이다. 우리는 현장에서 숙박하기 위해 천막제작소에 주문제작한 커다란 텐트와 솥, 식기, 취사도구, 식자재 등을 직접 가지고 다녔다. 요즘처럼 자동차가 흔한 세월도 아니고 직행, 완행 갈아타며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면 현장까지는 도보로 운반해야 했다. 어쩌다 손수레라도 빌려 쓰면 운수대통한 날이 된다. 더구나 옛날 버스들은 짐을 싣는 공간이 따로 없어 모든 장비들을 버스의 통로에 놓음으로써 때로는 다른 승객들의 따가운 눈총을 감수해야 했다. 승차거부를 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깊은 밤 텐트 안으로 들어오는 자연 속 생명들의 소리, 아침 여명의 신비로움 등 야투의 동인들은 시간이 갈수록 자연과 깊은 교감을 갖게 되었다. 특히 청벽연구회 중 우리를 덮친 폭풍우는 대자연 앞에 인간이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를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태풍이 멎을 때까지 우리는 모두 천막 자락을 잡고 날아가지 않도록 애를 써야 했다. 비가 갠 후 백사장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을 되찾았지만, 작품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당시 현장을 방문했던 박석원선생은 ‘공간(空間)’지 기고에서 “야투(野投)여 야투(野鬪)하라!”라고 크게 격려했었다.
청벽 태풍(모진 비바람에 처참하게 망가진 텐트와 헝클어진 사물, 그리고 흔적 없이 사라진 작품들이 드라마틱한 현장의 진실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