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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빼뚤 글쓰기

가지 않은 길

요술공주 셀리 2023. 12. 15. 12:00

어제는 내가, 오늘은 네가 창문에 딱 붙어있구나. 어제는 내가 비를 바라보고, 오늘은 네가 나를 친구 하자 하는구나. 하루종일 뽀얀 비가 내렸고, 밤새 그치지 않았지. 조곤조곤 낮은 자장가 소리 같아서 빗소리에 잠을 잘 자고 싶었는데, 어둠 저편에서 노래 부르는 너의 소리. 칠흑 같은 빗소리에 오히려 잠을 설쳤구나.

나무늘보 되어보기. 불멍, 물멍, 하늘멍, 나무멍으로 하루종일 멍 때리기. 커피 한 잔으로 한나절 보내기, 솔잎 떨어진 오솔길을 맨발로 걸어보기, 별이 쏟아지는 언덕에 누워있기. 벽난로 앞에서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숲 바라보기. 가족과 함께 먼 나라를 여행하기.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그림 그리기.
하고 싶은 일이 어디 이뿐이랴. 가보고 싶은, 가지 않은 길이 어디 이뿐이랴!

제부가 내려준 커피가 생각나는 아침이다. 출근을 하기 위해 바쁜 아침에도 제부는 꼭 우리가 마실 커피를 내려주었다. 구수한 '운남 커피'가 유난히 고픈 오늘, 미국의 시인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1963)의 '가지 않은 길'이 왜 생각났을까?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길은 길게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피천득 옮김)]

퇴직을 하고 서울에 남느냐, 강원도로 가느냐 두 갈래 길에서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 '가지 않은 길'이 아니라 어쩌면 '모르는 길'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해 보지 않아서 모를 때이니 '모름'이 용기일 때, 겁도 없이 선택을 했을 것이다. 날마다 출근을 하고 교사와 학생을 위해 일했던 삶에서, 호미를 잡고 풀을 뽑고 가끔은 하늘과 강을 바라다보고 꽃과 나무를 가꾸는 처음 해보는 생활을 택했다. 밭에서 직접 키운 채소로 김치를 담그고, 직접 요리를 하는 생활. 살아온 경험은 전혀 다르지만 마음이 닿는 이웃과 어울렁더울렁 살고 있다. 두 갈래 길에서 하나를 선택한 그것 때문에 많은 것이 달라졌다. 정신 노동자에서 육체노동으로 갈아탔고, 짜인 시간에 나를 구겨 넣었었는데 지금은 '달리'의 늘어진 시계(녹아내리는 시계)처럼 '새로 가는 시계'를 돌리고 있다.

그런데, '가지 않은 길'은 내 경우에 해당할 뿐, 남들에겐 익숙한 길. '남들은 다 가본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갈래 길이 다시 나타난다면 나는 또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할 거다.
2년 전의 어느 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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