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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빼뚤 글쓰기

내 자리

요술공주 셀리 2024. 9. 8. 13:33

"내 자리도 하나 맡아줘." TV가 귀하던 때, 우리 자매는 김교수님 댁으로 연속극을 보러 갔었다. 드라마가 시작되는 저녁시간. 김교수님 안방은 작은 영화관이었는데 저녁식사를 마친 동네사람들 대부분이 TV앞에 모였었다. 그런데 어린 난 드라마 속에 빠져 있느라 그땐 몰랐었다. 내 집 안방을 사람들에게 내어준 김교수님 가족들은 날마다 내 자리를 양보하고 내 시간을 양보했었다는 것을......
난, 발 디딜 틈 없는 그 집 작은 안방에서 내 자리 하나만 생각했던 것이었다.

올해도 내 꽃밭엔 이웃에게 씨를 얻어와 뿌렸던 곳에 어김없이 나팔꽃이 피었다. 저절로 태어나 세력을 넓힌 기득권의 여왕 나팔꽃이 있는가 하면, 눈을 씻고 찾아야 간신히 보이는 풍선초도 있다. 풍선초는 아림, 아정이에게 보여주려고 의도를 하고 씨를 뿌렸는데, 두 개만 뿌리를 내렸다. 욕심 많은 나팔꽃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풍선초는 타고 올라갈 자리가 없어 방황을 하고 있으니, 나팔꽃을 뜯어낼 수도, 같이 올라가라 새치기를 할 수도 없게 되었다. "나쁜 나팔꽃 같으니라고..." 



그렇게 동거 아닌 동거를 시작한 나팔꽃과 풍선초. 무심히 지나치던 어느 날, 풍선초가 가지 하나를 더 뻗어 열매를 맺었다. 세상에 집 한 칸, 지지대 없이 허공에 가지를 뻗어 좁쌀만 한 꽃을 피우더니 어렵게 어렵게 열매 한 개를 맺은 것이다. 가늘디 가는 줄기로 나팔꽃 집에 월세조차 못 얻은 풍선초는 작년엔 수십 개의 열매를 매달았는데 올핸 한 가지에 한 개씩 달랑 두 개를 매달았을 뿐이다. 자리싸움에서 보기 좋게 참패를 당한 탓이다. 불쌍한 풍선초. 지지대 한 개를 세워 넝쿨을 잡아매주었다. 아니, 작지만 방을 한 칸 마련해 주었다.

 



그런가 하면 처음부터 수세미 자리, 여주자리를 만들어 심은 곳도 있다. 서로 엉키지 말라고 덩굴을 유도해서 자리를 잡아주었더니 싸우지 않고 잘 자라고 있다. 따로 심어주었다고 이렇게 얌전히 자랄 수 있을까? 참 대견하고 고맙다.



경쟁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경쟁에서 내 자리를 확보하기. 어렵게 얻은 내 자리를 지켜내기. 필요할 땐 남의 자리도 넘보기(금규화를 타고 올라간 나팔꽃). 나팔꽃이 그런 꽃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줄기가 가늘고 여릿여릿한 꽃을 피우길래 소녀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나팔꽃이 영역싸움의 여왕일 줄이야......



그런가 하면 심어준 대로 남을 방해하지 않고 제 영역만 지키는 수세미. 굵은 수세미를 매어달고 그 큰 잎사귀로 팔짱을 낀 채, 저보다 작은 이파리와 저보다 작은 꽃, 저 보다 작은 열매를 맺는 여주와 사이좋게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나팔꽃과 풍선초는 '강원도 정원군 욕심면 싸우리'에 살고, 수세미와 여주는 그 옆동네 '강원도 착하면 예쁘리'에 살고 있다. 수세미는 어느 날 이사 온 우단동자도 품어주고, 어느 날 놀러 온 풍선초도 환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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