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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빼뚤 글쓰기

'별거' 아니다

요술공주 셀리 2022. 11. 11. 11:22

80년대 후반, 부모님을 모시고 두 아들과 상도동 낡은 주택에 살 때다.
부모님과 합가 한 지 1년여, 모든 살림살이와 먹거리를 책임져야 하니 퇴근길엔 시장을 보고, 마트에 들러 낑낑대며 버스 정류장에서 먼 집까지 걸어가곤 했다.

그런데 학교에서 맞은편에 앉은 동료가 늘 불평을 하곤 했는데, "시골 사는 시부모님이 농사 지었다며 쌀과 김치 등 온갖 농작물을 보내와서 짜증이 난다"는 것이다.
때론 입맛이 맞지 않아 버린 적도 있다고도 했다. 쌀 한 톨, 파 한 단도 일일이 사서 먹어야 하는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여기 내려와서 처음 김장을 해보니, '흔하디 흔한 김치가 별거 아니지 않더라'를 깨우친다.

배추를 키운다는 건 꽃을 키우기보다 더 힘들더라.
밭을 갈아 두둑을 만들고 검정 비닐을 씌워 모종을 사다 일일이 심는 작업부터, 물 주기와 풀 뽑아주기 등 여간 손이 가는 일이 아니다. 특히 벌레가 배춧잎을 다 갉아먹을 때는 어떻게 그런 용기가 생기는지, 평소 벌레를 보면 도망가던 사람이 손으로 벌레를 잡아 발로 콱 밟아 버리기까지 했으니......
이렇게 키운 배추를 뜯고 다듬어서, 밤새 소금에 절이고 소를 만들어 일일이 손작업을 해서 통에 담아야 김장이 마무리된다.

그동안 엄마가 보내준 김장김치가 이렇게 긴 과정을 거치는 줄 직접 해보지 않았을 땐 결코 모를 일이었다.

"동생에게 김장김치를 보내라"는 엄마의 숙제를 받고 '선무당이 만든 김치가 마음에 들까 걱정'이기보다 왜 스멀스멀 화가 올라오는 걸까......?

택배를 보내기 위해 창고에서 튼튼한 보루 박스를 골라 챙기고, 마트에 가서 김장용 비닐을 사서 통에 담은 김치를 꼼꼼히 다시 포장을 해야 한다. 주말엔 우체국이 영업을 하지 않으니 평일에 차를 타고 방문해서 택배를 보내야 한다. 그것도 20Kg을 넘기면 안 된다 하니 신경이 많이 쓰인다.

그런데, 동생이 보내달라한 것도 아니고 어차피 넉넉해서 보내주려 했던 건데, '공부 시작하려는데 엄마가 공부하라' 하면 하기 싫었던 어린아이처럼, 엄마의 직진 아들사랑에 잠깐 질투가 났었나 보다.

급한 것도, 딱히 할 일도 없는 시골에서 까짓 이 정도 일이야, 별것 아닌 일이다.
이 번 일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자.

그런데 누군가에겐 별거 아닌 일이 또 누군가에겐 특별한 일이기도 하다.
농사가, '별것 아닌 일'이 절대 아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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