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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빼뚤 글쓰기

어머니의 기일

요술공주 셀리 2023. 10. 8. 14:44

우린 이산가족이었다.
애 아빠는 해외 근무. 아이는 시댁에서, 애 엄마는 직장 때문에 친정에서 지냈다.
아이는 친할머니와 당시 대학생이던 고모들이 돌봐주었다. 40여년 전 일이다. 주말마다 아이를 보러 시댁에 가면 아이는 그리운 엄마가 언제 또 가버릴지 몰라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큰 아이는 40이 넘도록 여전히 '야행성'이다.

첫 손주를 키워주신 분이 시어머님이시다.
워킹맘 며느리를 두신 어머니는, 낮엔 시부모님을 봉양하고 12시가 넘어서야 자는 손주를 돌보느라 늘 잠이 부족하셨다. 종가의 종부로 그 많은 제사를 모시고, 명절이면 30여 명이 넘는 일가친척들을 챙기느라 50대에 이미 허리가 굽으셨다고 한다.

남편이 해외근무를 마무리 하고 돌아와서야, 오랜 이산가족을 청산하고 우리 가족은 아이 둘과 함께 네 식구가 모여 살게 되었다. 그런데 석양이 내리쬐는 가을 어느날, 아버님이 서울에 올라오셨다. "애 할머니가 손자가 보고 싶어 저리 안타까워하니, 우리 함께 살지 않겠니?"

자수성가한 우린 있는 돈 없는 돈, 은행 돈까지 끌어모아 서울에, 작은 주택을 마련했다. 시부모님이 올라오셔서 삼대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이산가족으로 뿔뿔이 흩어 살던 가족이 갑자기 대가족으로 살아가자니 부모님도 우리도 쉽지 않았다. 종가인 우린 2개월마다 제사가 있었고 명절마다 종가인 우리 집으로 친척들이 찾아오니, 거의 매달 손님을 치러야 했다. 보수적인 시부모님은 아들과 손주는 아예 부엌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셨고, 직장 일로 생긴 늦은 귀가도 허락지 않으셨다. 짧은 치마와 비비드 한 색상의 옷도 간섭하셨고 아이들 교육과 훈육에도 깊이 관여하셨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주말마다 찾아오는 형제자매들이었는데, 그 어디에도 쉴 틈이 없는 공간과 시간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그 중심에 어머님이 계셨으니 집도, 직장도, 남편까지 내 편이 없었다. 그땐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며느리로 살던 내게 며느리가 생긴지 벌써 2년째다. 그런데, 육아로 고생하는 며느리를 보면서 이제야 깨닫고 있다. 분유 타서 먹이고, 씻기고, 기저귀 빨고, 잠투정 많은 손자 재우고, 시부모님 봉양하면서, 어쩌다  감기라도 걸려 칭얼 대는 손자 때문에 밤샘도 여러 날이었을 어머님의 고생을 이제야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며느리 걱정할까 힘들다고 내색 한 번 안 하셨던 어머님이다. 그러니 난, 아이는 저절로 크는 줄만 알았는데, 7개월 된 내 손주를 보면서 어머님이 얼마나 힘드셨을지를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어머님이 고관절 수술을 하시고 누워계셨을 때가 있었다.
작은 것까지 일일히 돌봐드릴 사람이 필요했는데, 두 아들이 선뜻 나서서 그 어려운 일을 해주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두 아들이 제일 슬피 울었고, 여전히 우리 아이들은 할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분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갓난아기 때부터 키워주셨고, 학교에서 집에 오면 할머니가 늘 맞아주시고, 따순 밥을 먹여주고 챙겨주셨으니 당연한 일이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두 아이 훌륭히 키워 주셨고, 부족한 며느리 잘 참아주시고 살펴주신 걸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님, 오늘 어머니의 기일에 평소 좋아하시던 잡채랑 육전을 만들었습니다. 좋아하시던 포도와 찐빵을 올리며 이제라도 마음을 다해봅니다."
꽃을 좋아하셨던 어머님 영정 앞엔, 어머니 닮은 구절초와 코스모스를 올려 드렸다. 며칠 전 아버님과 함께 꿈에 찾아오신 어머님. 미운정보다 고운정이 더 깊은 어머니가 이렇게 그리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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